최상원 사회2부 영남팀장
최근 두세달 경남 밀양시민들은 팔자에 없는 호강을 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국전력 사장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번갈아 찾아와 두 손을 잡고 머리를 숙이더니, 지난여름에는 한전 직원들이 밀양강을 청소하고 낡은 집의 도배를 해주고 장판도 갈아줬다. 한전은 백내장·녹내장 등을 앓는 노인들의 눈 수술비도 대줬다.
급기야 추석을 앞두고는 국무총리까지 밀양을 찾았다. 일부 주민들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 앞에 드러눕기까지 했으나, 국무총리는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그들에게 수백억원의 선물을 약속하고 갔다.
765㎸ 송전탑 건설 문제로 마찰을 빚은 지 8년째. 정부와 한전은 경남 밀양에서 ‘돈 잔치’를 하겠단다. 돈은 필요 없다고 주민들이 반발하니, 오히려 돈을 더 주겠다고 한다.
지난 11일 정홍원 국무총리가 밀양시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공개된 보상안을 보면, 송전선이 통과하는 밀양 5개 면 30개 마을 1800여가구에 지역특수보상비 185억원을 지급한다. 이 가운데 60%인 111억원은 마을별 공동사업에 사용하지만, 나머지 40% 74억원은 각 가정에 평균 400만원씩 현금으로 지급한다. 또 5개 면에 면마다 12억~16억4000만원씩 모두 70억원을 들여 농산물 공동판매시설을 설치한다. 송전선이 통과하는 땅에는 472억원을 들여 태양광 발전사업을 추진하며, 이 사업에 현금이나 땅을 투자한 주민에게는 연 5% 이상의 투자수익을 20년간 보장한다. 밀양의 숙원사업인 나노융합 국가산업단지도 건설하기로 했다.
피해 주민에게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만한 액수를, 게다가 개별적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것은 현행법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새로운 법을 만들려 하고, 한전은 보상 관련 내규를 바꾸겠다고 한다. 법적 근거를 뜯어고쳐서라도 송전탑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언 발에 오줌누기식 처방’은 앞으로 더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다. 당장 밀양 주변지역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전은 울산 신고리원전에서 생산할 전기를 수송하기 위해 울산 울주군, 부산 기장군, 경남 양산시·밀양시·창녕군 등 5개 시·군 90.5㎞ 구간에 765㎸ 송전탑 161개를 세우고 송전선로를 설치하는 ‘765㎸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밀양을 제외한 4개 시·군의 공사는 이미 끝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밀양에만 법적 근거까지 바꿔 ‘돈 폭탄’을 투하한다면, 기존 법적 근거에 따라 돈맛도 못보고 송전탑 건설을 허용한 지역 주민들은 무엇이 되나.
게다가 이미 전국에는 765㎸ 송전탑이 강원 333개, 충남 265개, 경기 252개, 충북 35개, 경북 17개 등 902개나 세워져 있고, 이를 연결하는 송전선의 길이만 457.3㎞에 이른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앞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765㎸ 송전탑을 세울 때마다 밀양 수준의 보상을 할 것인가? 765㎸의 아래 단계인 345㎸ 송전탑을 세울 때는 또 어떤 보상을 할 것인가?
지금도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밀양 주민들은 “보상금은 필요 없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초고압 송전탑의 대안을 찾아보자”고 호소한다. 그러나 한전은 이래서 어렵고 저래서 곤란하다며 8년째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보상금의 현실화’를 내세우고 있다. 피해에 대한 적정한 보상은 당연하다. 하지만 단 한푼의 보상금이라도 결국은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올 돈인데, 반대 주민들을 입막음하기 위해 마치 자기 돈을 인심 쓰듯 나눠주겠다는 정부와 한전의 태도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이런데도 주민들과 보상 합의를 했다며 한전이 송전탑 건설 공사를 재개한다면, 밀양은 또다시 전쟁터가 될 것이다.
최상원 사회2부 영남팀장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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