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Ranicki)가 지난 18일 93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폴란드 태생 유대인인 그는 독일 사회에서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MRR’로 통했다. 문단에서는 ‘교황’이라는 별칭을 들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그는 독일 공영방송의 <문학사중주>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문단과 독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에 앞서 1973년부터 1988년까지는 일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학면 책임자로 일했다. <문학사중주>가 폐지된 뒤에는 <라이히라니츠키 솔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일간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그를 가리켜 “우리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 표현했다.
1995년 라이히라니츠키는 주간 <슈피겔>의 표지에 충격적인 방식으로 등장했다. 막 발간된 귄터 그라스의 소설 <광야>를 두 손으로 찢는 모습이었다. “가치 없는 책”이라며 <광야>를 혹평하는 라이히라니츠키의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의 대외적 표현은 단호하고 가차없었다. 그라스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와 작품에 대한 그의 판단이 그러했다. 당연히 적이 많았다.
2002년 7월 독일 보수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마르틴 발저는 <어느 비평가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악평에 분개한 작가가 평단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유대인 비평가를 살해한다는 줄거리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대인 비평가가 라이히라니츠키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 때문에 독일 문단 안팎에서는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발저를 비판한 반면, 노벨문학상(1999년)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는 발저 편에 섰다. 지난해에 그라스가 발표한 이스라엘 비판 시 <말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라이히라니츠키는 “혐오스럽다”고 일갈했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셰익스피어와 괴테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믿는다”고 답했던 라이히라니츠키가 그 예술 거장들의 곁으로 갔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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