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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회장님이 노숙자 될 수도’ / 정영무

등록 2013-10-08 19:05수정 2013-10-10 23:32

정영무 논설위원
정영무 논설위원
재계 38위 동양그룹이 망가지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어 제2, 제3의 동양 사태가 우려된다. 동양 계열사 회사채 등에 투자한 개인투자자들은 희생양이 됐다며 9일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겠다고 벼른다. 자녀 혼수 비용, 전세 보증금, 노후자금 등을 잃게 됐다는 개인투자자가 5만명, 투자금액은 1조원에 이른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생활비까지 털어 기업어음을 매입했다고 밝혔지만 대주주 일가의 배임이나 도덕적 해이를 의심하게 하는 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동양그룹은 한때 재계 5위에 오를 정도로 역사와 저력이 있는 기업이다. 산업의 기초인 시멘트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금융을 두 축으로 하는 회사다. 비록 주력업종의 업황이 나빠졌다고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했다. 금융계와 재계에서는 빨간불이 켜진 뒤에도 많게는 일곱 차례 회사를 살릴 기회가 있었다고 꼽는다. 두세 차례도 아니고 더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살길을 두고 계속 잘못된 선택을 하는 바람에 그룹 해체의 비운을 맞게 된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자산 매각을 서두르지 않으면 (회장님이)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는 보고서도 일찍이 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룹의 뿌리인 동양시멘트를 매각하자는 제안은 대주주의 반대로 기회를 날렸다. 지주회사인 ㈜동양이 주채권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으며 자구노력을 할 수도 있었지만 회사채와 어음 발행으로 문제를 피해 갔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자 사업구조를 조정하고 자산을 매각하려 했지만 경영권에 대한 집착과 본전 생각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현 회장은 재계의 젠틀맨으로 불린다. 꽉 막히거나 무리수를 둘 사람도 아닌데 기회를 떠내려보낸 까닭은 의사결정 시스템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기업이 위기에 처할수록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밀려나고 대주주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남아 인의 장벽을 치게 되고, 이것이 정확한 현실 파악을 막는 요인이 된다고 한다. 동양은 여기에 회장 부부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비선이 있었다고 한다. 이사회를 한낱 장식품으로 걸치고 입안의 혀 같은 비선에 의존하는 것은 곧 탐욕과 요행수를 견제할 합리적 규율의 부재를 뜻한다.

소버린 사태 이후 마음먹고 이사회 중심의 경영으로 한발 내디뎠던 에스케이 최태원 회장은 비선의 펀드 투자에 놀아나다가 철창신세를 지게 됐다. 펀드 투자에 물리면서 상식과 합리 대신 독선 경영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사회가 쭉 제 기능을 했다면 최 회장의 비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당시 사외이사로 참여했던 인사는 전한다.

혼돈 속에서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번창한 기업들을 분석한 짐 콜린스는 이 기업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예지력이나 혁신 능력이 크게 뛰어난 건 아니라고 한다. 대신 가치나 목표, 행동기준, 일처리 방식 등에서 규율의 일관성이 남달랐다고 한다. 인내심과 절제력을 발휘했고, 과민반응하지 않으며, 목표와 상관없는 기회를 잡으려고 달려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얼이 빠질 정도의 위기의 순간에도 합리적 의사결정과 냉정한 견제 시스템이 작동한 점을 높이 산 것이다.

글로벌 기업을 표방하지만 정작 안을 들여다보면 구멍가게만도 못한 기업들이 동양만은 아닐 것 같다.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사외이사를 최소 한 명 이상 선임하도록 해서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총수의 독단과 오판을 막자는 상법 개정안의 규율이 필요한 이유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관련영상] [한겨레 캐스트 #177]‘동양그룹 폭탄’, 막을 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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