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의 조선은 지식의 수용·정리와 확장·활용이라는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기술학 등도 이 시기에 집대성됐다. 그 한가운데에 훈민정음(한글) 창제가 자리한다. 훈민정음은 문자체계를 가리키는 말이자 창제 원리를 담은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은 지구촌에서 ‘문자 자신이 문자 자신을 말하는’ 유일한 책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오히려 때늦다.
한글의 우수성과 창제의 세계사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책 가운데 하나가 노마 히데키 일본 국제교양대 교수가 쓴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이다. 한글은 입 모양을 본떠 음(소리)에 분명한 형태(게슈탈트)를 부여했고, 자음 자모뿐 아니라 다양한 모음 자모에도 형태를 줬으며, 자음과 모음을 합쳐 만드는 음절도 형태화한 점에서 특별하다. 문자 구조로 볼 때 알파벳은 기본적으로 자음만을 나타내는 문자였으며 아랍문자 역시 모음 문자가 없고 필요에 따라 기호를 사용했다. <훈민정음>은 언어학이 20세기가 돼서야 마침내 만난 ‘음소’(낱말의 의미를 구별 짓는 최소 소리단위)라는 개념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 이는 세종이 ‘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한 상대’였던 당시의 ‘한자한문 중심 역사·세계’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글 창제는 ‘혁명’이자 ‘목숨을 건 비약’이었다.
안타깝게도 2005년 시작돼 순조롭게 진행되던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의 회의가 2009년 12월 이후 열리지 못하고 있다. 이 사전에는 남쪽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쪽의 <조선말대사전>에서 추출한 표제어에다 현지조사 등을 통해 새로 찾은 어휘를 합쳐 33만개를 수록할 예정이다. 이들 어휘를 절반으로 나눠 남북이 각각 뜻풀이 작업을 하고 공동회의에서 합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사업의 근거인 법의 유효기간이 얼마 전 2014년에서 2019년 4월로 연장되긴 했으나, 남북이 만나지 않으면 사전은 완성될 수가 없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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