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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마지막 문방구 / 이원재

등록 2013-10-22 19:05수정 2013-10-23 15:08

이원재 경제평론가
이원재 경제평론가
“아빠, 슬픈 소식이 있어. 그 문방구가 문을 닫았어.” 아침식사 자리에서 아이가 말했다. 내 초등학생 시절, 학교 앞 세 개의 문방구 중 하나였다. 오래 버틴다 싶었는데, 결국 다른 동네 가게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지만, 아이에게 기억을 전할 흔적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동네 서점, 문방구, 구멍가게… 이런 곳을 운영하던 이들이 가졌던 경제적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매우 소박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1인당 국민소득 근처의 적절한 수입을 얻고, 한 동네에서 이웃들과 어울리며 살면서 책을 다루거나 아이들을 만나며 사는 게 보람 있던 이들이었을 것 같다. 최소한 자산을 쌓고 불려 수십억 수백억원대 자산가가 되거나 재벌이 되려는 대박의 꿈을 지닌 이들은 아니었을 게다.

나는 최근 독일 에버트재단과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함께 연 정책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독일 발표자들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좋은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치로부터 토론을 시작하자는 이야기였다. 눈앞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눈앞의 유권자에 대한 대응을 주로 이야기하는 전형적 정책토론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생각해 보면 정치권의 정책논쟁은 늘 뜨겁지만, ‘무엇이 좋은 사회인가’와 같은 가치에 대한 토론은 들어본 지 오래됐다. 그 기반이 될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토론은 더욱 찾기 어렵다.

최근의 기초연금 논란만 해도 그렇다. ‘20만원’을 둘러싼 기술적 논쟁만 무성했다. 실제 한국사회에서 노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는 오리무중이다.

많은 비판을 받았던 김용준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장의 ‘잘못 사신 겁니다’라는 발언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돌이켜 토론해 볼 만하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기초연금을 받게 된다면 인생을 잘못 사신 겁니다”라고 했다. 기초 연금을 받지 않는 소득 상위 30%는 잘산 것이고, 그 아래 70%는 잘못 산 것이라는 이야기다. 곧 돈과 집과 차를 가진 이들은 인생을 잘산 이들이고, 나머지는 잘못 산 것이다. 다들 손가락질하지만, 그건 실은 오랫동안 우리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가장 강력한 가치였다. 개인은 더 많은 돈과 더 비싼 집을,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국가는 양적 경제성장을 향해 달려왔다. 다른 가치는 잊은 채.

여전히 잘산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나는 다른 하나의 가설을 떠올려 본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절한 수입을 안정되게 오랫동안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젊을 때도 나이가 들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신뢰할 수 있는 이웃과 친구들이 가까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강할 때나 약할 때나, 누군가를 도우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게 좋은 삶이 아닐까? 어쩌면 동네 마지막 문방구 아저씨가 가졌을 법한 바람이다.

여기서부터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좋은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해진다. ‘소박한 경제적 꿈’을 지키면서 다른 사회적 가치를 지켜가는 삶이 가능한 체제는 무엇일까? 나의 가설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이윤극대화에서 건전한 이윤으로, 물질의 성장에서 행복의 성장으로, 대박의 꿈에서 지속가능성으로 패러다임이 바뀐 체제다.

세상은 바뀌었다. 우리에게 이제 새벽종이 울리는 새마을운동으로 전국의 초가지붕이 하루아침에 슬레이트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삶은 이제 한 판의 승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런 변화의 시기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토론하기 적절한 때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질문으로부터 합리적인 정치와 정책이 시작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이원재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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