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경력단절 여성이 많다. 이들 중 상당수가 시간제 일자리를 원한다. 그래서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제공하겠다. 그러면 고용률 70% 달성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정책이 뭐가 문제인가! 아마도 박근혜 정부의 입장은 이런 것 같다.
문제는 여기서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경력단절이 되어 실업 혹은 비경제활동 인구가 되든지, 아니면 시간제 일자리를 택하든지 하는 두 가지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둘 중에서만 고르라면 확실히 시간제를 선택하는 여성이 많을 수 있겠다. 하지만 좀더 평등한 양질의 공보육 서비스가 확충되고 남녀 노동자 모두의 진정한 시간 선택권이 전생애에 걸쳐 확대된다면 남성은 초장시간 노동으로 가정과 멀어지고, 여성은 한정된 시간제 일자리에 고립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이 대안은 왜 선택지에서 빠져 있는지 궁금해진다.
또한 현 정부는 유럽, 특히 네덜란드의 성공 사례에 매우 고무된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에 관심이 있다면 여성 시간제 확충을 통한 고용률 제고 외에도 바세나르 협약이 체결되던 시점의 특수한 사정이나 산별 단체교섭을 통한 시간제에 대한 보호, 적은 시간을 일해도 생계에 큰 부족함이 없는 복지국가 정책, 무엇보다도 그 빛나는 성과에 뒤따르는 큰 그림자에 주목해 주었으면 좋겠다.
네덜란드는 남성은 전일제로 일하고 여성은 시간제로 일하는 전형적인 1.5인 생계부양자모델 국가이다. 덕분에 보육시설의 확충은 지연되었고, 가사와 육아 책임을 더 부담했던 여성의 경력 개발은 제한되었다. 자녀 양육의 시기가 지난 뒤에도 네덜란드 여성은 계속 시간제로 일했기 때문에 고용률이 높아졌다 해도 전일제로 환산된 여성 인력의 활용도는 낮은 편이다. 고령화가 더 진행됨에 따라 이와 같은 여성 인력의 저활용은 향후 네덜란드의 발전을 상당히 지연시킬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시간제 일자리에서 주로 활용하는 서구의 경험은 시간제가 남녀 소득 격차를 악화시키고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불이익과 불평등을 지속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후발국가의 이점이 무엇인가. 선발국가의 실수를 피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성 비정규직의 40% 정도는 양질은커녕 보통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매우 나쁜 시간제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다.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더 만들기 전에 이 일자리들만이라도 보통 수준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닐 것이다.
정부는 여성이 경력단절을 막기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원하는 것이 자발적인 선택이라 해석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차악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장시간 근로를 통해 직원의 몰입과 충성도를 평가하는 우리나라에서 시간제는 장기적으로 경력단절에 버금가는 여성에 대한 낙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시간제 일자리 대신 시간 선택의 자유가 전생애주기에 걸쳐 모든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 더 나은 일자리로 진입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노동자 모두에게, 그 역시 전생애주기 동안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 고용률은 시간제가 아니라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공공서비스 분야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높여져야 한다. 노동시장 지위와 상관없이 경제적 안정과 일자리에서의 대표성과 교섭권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인 대안인가.
밀턴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언급하면서 “대안적인 정책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될 때 곧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렸던 신자유주의는 이제 불가피한 세계적 추세가 되었다. 정부의 정책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현실세계에 착근시키기 위한 진보세력의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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