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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그물] 공적 자기에만 매몰된 사회

등록 2013-11-04 19:07수정 2013-12-16 16:03

이명수 심리기획자
이명수 심리기획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소통이 안 돼 답답한 경우가 있다. 자기 얘기만 해서 그렇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았어도 조직 내의 심각한 갈등이 있어도 그건 자기에게나 현안이다. 우리 회사 자재과 김 과장 있잖아, 이번에 내가 맡은 알파프로젝트 있잖아, 그런 식으로 깨알 같은 속사포가 쏟아진다. 우린 김 과장 모른다. 정상적인 대화가 될 리 만무하다.

중요한 지위에 오른 사람일수록 이런 현상은 걷잡을 수 없다.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지극히 사적인 만남인데도 줄곧 자기 업무에 관한 얘기로 대화를 독점한다. 이미 대화가 아니다. 어렵게 얘기를 그 만남에 걸맞은 일상의 화제로 옮겨놔도 조금 있으면 다시 원점이다. 어떤 경우엔 대국민 담화를 통해서 알아야 할 얘기를 밥 먹는 자리에서 듣고 있는 기분까지 든다.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넘쳐나서다. 자기 일이 모두의 관심사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어서다. 100명이 있다면 2, 3명만 거기에서 예외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가면(페르소나)을 바꿔 쓰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회사에선 부사장이지만 아버지·동생이기도 하고 누구와의 관계에선 친구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사회적 가면을 바꿔 써야 마땅하다. 자신의 여러 가면 중 어느 한 가면과 지나치게 자기를 동일시하다 보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일과 관련된 역할 가면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다. 검사가 부부관계에서도 검사 행세를 하고 회장이 친구 모임에서도 회장 대접을 받으려 하고 사단장이 집에서도 사단장으로 군림하려 하면 삼류 코미디가 되는데 현실세계에선 그런 일들이 다반사다. 비극적 코미디다.

돈만을 중심에 놓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돈 많은 사람이 형이라는 우스개가 현실이 된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나 힘있는 이들이 사적인 영역에서도 자기와 관련된 정책이나 업적만을 전부인 양하다 보면 필시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자신의 일부를 전체의 자기로 착각하고 있으니 사람에 대한 감각이 있을 리 없고 그러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현실감각이 없으니 소통은 애초에 불가하다. 어떤 역할을 맡기든 똑같은 발연기로 일관하는 아이돌 스타의 복사판이 된다. 그런 이들의 행태가 왜곡된 자기만의 세계에서 우주유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사극이나 정치권력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 남자들이 울지 않는다는 거 다 헛말이란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윗사람에게 충성다짐을 하기 위해서, 주군의 처지에 공감하기 위해서 엉엉 울기까지 한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그러지 않을 사람들이 공적인 자기 역할에만 매몰되니 그런 기이한 풍경이 벌어진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런 게 남들 눈에 기이하게 보일 것이라는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진짜 답답한 건 이토록 공적 자기가 과잉인 사회에서 공적인 개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작 공적인 자기는 공적인 영역에서보다 개인의 명예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더 많이 사용된다. 아니면 더 힘센 자리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만 활용된다.

불필요하게 공적인 자기에 매몰된 이들이 벌이는 일들은 시대착오적이고 비이성적인 경우가 많다. 현실감각이 현저하게 떨어져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아버지 대통령 각하’라거나 ‘한국은 좀 독재를 해야 한다’거나 ‘차라리 유신시대가 좋았다’는 따위의 언설들은 나올 수 없다.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줄선 공적 자기들의 자화상이다.

공적인 자기에 매몰된 모든 권력은 짜증날 정도로 어이없고 언제나 위험하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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