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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성나정이 응답하라 / 이유진

등록 2013-11-17 18:53수정 2013-11-18 10:01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응사)를 챙겨 본다. 록카페, 삐삐,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신세대 문화’와 미네르바, 독수리다방, 그레이스 백화점 같은 옛 신촌이 등장하고 <한겨레> 호외까지 그대로 재현된다. 줄거리는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부잣집 ‘촌놈’들과 하숙집 딸 성나정, 천재 의대생 ‘쓰레기’의 풋풋한 연애담이다.

사실은 연애만 하기 힘든 시대였다. 오랜 군부독재 뒤 1993년 ‘문민정부’가 탄생했지만 대학생들은 정권퇴진 운동을 계속했다. 1994년 6월9일치 <한겨레> 사설은 한총련 간부 90명에 대한 무더기 검거령을 비판하며 학생들의 이념논쟁은 학교 안에서 토론으로 결론나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권력의 일방통행은 그러잖아도 신세대뿐인 대학 사회의 탈정치화만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상아탑의 순수성을 온 사회가 지켜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던 때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 대학 캠퍼스는 세속과 달랐다. 부잣집 아들이나 하숙집 딸이나 똑같이 학생식당 밥을 값싸게 먹을 수 있었다. 스타벅스는 없었지만 학생들은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들고 자신의 안위와 현실참여 사이에서 성장통을 겪었다. 교수들은 ‘운동권’ 학생들의 거친 사회 비판을 멋들어진 지적 토론으로 유도했다. 대학은 신성했기에 백골단도 대자본도 교문 앞에서는 멈칫했다. 지성의 전당은 학생의 학생다움을 보호하려는 이들의 의지와 전통으로 쌓일 뿐, 최신식 건물로 지어 올려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대학들은 달라졌다. 세상의 ‘먹고사니즘’이 캠퍼스 안까지 침투했다. 학교는 재개발로 전통의 공간을 파헤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고려대, 서강대, 이화여대에 이어 요즘은 <응사>의 배경이 되는 연세대에도 거대한 공사판이 펼쳐졌다. 학생·교수들의 반대 목소리가 커 들여다보니, 학교는 주차난을 해소하고 지하도를 뚫어 차 없는 거리를 만들려는 모양이다. 학교의 상징이던 백양로 은행나무들 상당수가 뿌리째 뽑혔고 일부는 고약한 열매 냄새를 풍긴다며 그루터기가 잘려나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바깥사회의 불도저식 개발 방식이 캠퍼스 안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 안팎에서 높은 지성으로 존경받아온 노교수가 공사를 가로막는다며 위협과 모욕을 당했고, 사업본부는 새벽에 재개발 반대 농성 천막을 기습철거했다. 노숙인이 거기서 자고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협의체가 있었지만 공사를 반대하는 학생·교수의 의견은 무시됐다. 이 가을, <응사>에 신촌 일대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은행나무길이 등장하지 않는 까닭을 그곳에 가보고서야 알게 됐다.

국어사전을 보면, 상아탑은 ‘속세를 떠나 오로지 학문·예술에만 잠기는 경지’를 뜻한다. 방어막을 쳐줄 테니 실컷 사유하고 갈등하고 논쟁해서 나중에 응답하라는 게 이곳을 지켜준 사회의 합의였다. ‘재개발 대학’들을 가보면 화려한 건축물 속 커피점·레스토랑·편의점이 여느 도심 풍경과 진배없다. 학생들은 대자본의 영혼 없는 밥을 먹고, 학자들은 스스로 회사원이나 다름없다며 탄식한다. 지성의 산실은 더 근사하고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욕망의 용광로가 됐다.

명문이라 일컫는 선진국의 유서깊은 대학들을 가보면 오래된 공간이 자랑거리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그곳에서 나온 노벨상 수상자들을 부러워할 뿐, 거기 깃든 ‘정신’의 대물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변해버린 상아탑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지만 탁류를 거스를 수 없다며 외면했기에 여기까지 왔다. 청춘의 당황스러움과 순수를 보장해주던 대학의 낯선 모습에 다 자란 ‘나정이들’과 ‘쓰레기들’은 어떻게 응답하고 싶을까.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응사앓이’, 결말이 수상하다 [잉여싸롱#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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