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공동교과서 작업이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14일 국립외교원 설립 5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적으로는 점점 긴밀해지지만 정치·문화·군사적으로는 갈등이 고조되는,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를 타개하기 위해 동북아 공동 역사 교과서 발간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동북아 평화협력지대를 이루고, 유라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연계 협력을 이루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꿈”이라며 “아태공동체인 아펙(APEC)과 아시아유럽공동체인 아셈(ASEM)이 연결되면 새로운 경제협력 구도가 창출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2차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이 프랑스·폴란드 등과 역사 교과서를 공동 제작해 유럽의 화합에 기여한 것처럼, 지속적 대화와 협력을 통해 공동 역사 교과서를 발간하자는 전향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발상은 좋지만 역사인식이 선행되지 않는 한 실행은 쉽지 않을 것이다. 단적으로 세계대전은 서구 열강의 전쟁이었고 일본은 ‘예외적’ 주자였다. 전쟁 후 독일의 국민들은 홀로코스트의 만행에 참여한 과거를 처절하게 반성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역사 함께 쓰기’ 작업에 임했다. 그러나 서구 열강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안간힘 속에서 참전했던 일본은 늘 조역이었고 결국 서구의 핵폭탄 실험 대상이 되면서 굴복하게 된다. 미국은 자신의 친척들이 사는 독일 땅이었다면 핵폭탄을 투하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일본은 스스로를 전쟁의 가해자이지만 피해자로 인지하며 피해의식과 서구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일본만이 아니라 ‘기적적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과 중국도 선진 서구를 따라잡으면 된다는 서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정 동북아 지역에 살고 있는 “주체들에 의한, 주체를 위한, 주체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면 서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동북아 지역의 독특한 근대화에 대한 성찰이 우선되어야 한다. 초고속 압축적 근대화의 정점에서, 국가 차원부터 개인 차원까지 ‘멘붕’을 겪는 현실 위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멘붕 상태란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합의된 교과서를 쓸 수 있을까? 그것은 합의가 불가능한 상태를 함께 인지할 때 가능해질 일이다.
현재 역사학계에는 세 부류의 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첫째는 경제성장을 지속시켜 약육강식 세상에서 살아남자는 경제개발주의자 내지 신자유주의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그간의 불균형 발전의 결과로 심화된 사회문화적 위기 현상에 주목하는 후기근대 내지 탈근대주의자들이다. 셋째는 과학기술 발전 등에 의해 역사는 좌우된다고 보는 결정론자들이다. 이들 간에는 별 교류가 없다.
그러면 동북아 공동 역사 교과서는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그들 모두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로 합의가 불가능한 ‘춘추전국시대’임을 인정하고 섣부른 합의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합의가 어려운 부분은 그렇다고 정직하게 기록하면 된다. 역사는 원래 잠정적 결론이다. 그런 면에서 1차 공동 교과서는 합의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룰 것이다. 바로 그런 교과서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교과서의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의 답이 아닌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교과서라는 신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진정 이 작업을 추진하시겠다면 일단 같은 사관을 가진 역사학자들이 국경을 넘어 모여 신나게 일할 수 있게 지원하면 된다. 협동적 작업이 일정하게 이루어진 단계에서 그들로 하여금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작품을 내놓을 학문적 향연의 자리를 펼쳐주면 된다. 섣부른 갈등을 줄이고 섬세하게 단계적 추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공동체가 뜻을 모아가는 합의의 과정이며, 역사를 쓰는 일은 목적을 위한 ‘도구적 합리성’의 영역이 아니라 ‘인식 공유’ 자체를 위한 ‘소통 합리성’의 영역이다. ‘다름’에 대한 존중을 갖고 섣부른 합의를 강제하지 않을 때, 역사를 경제발전의 도구로 사용할 생각을 버릴 수 있을 때, 박 대통령의 꿈은 이루어질 것이고 동북아 평화와 지속가능한 미래도 가능할 것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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