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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망해야 산다 / 김회승

등록 2013-11-26 19:07수정 2013-11-26 21:22

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면 죄다 앓는 소리다. 제대로 실적을 내는 곳이 드물다. 경기는 회복세라는데 분위기는 흉흉하다. 삼성·현대차 빼면 대부분 그렇다. 건설·물류 업계는 말 그대로 사투 중이다. 그룹 총수들마저 줄줄이 감옥을 가거나 검찰 문턱을 드나들고 있으니 오너 리스크까지 겹친 형국이다.

 더는 버티지 못한 한계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면서 구조조정 실기론이 거세다. 정부가 ‘동양 사태’ 이후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으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어째 영 미덥지가 않다. 과거를 돌아보면 기업 구조조정이 때를 놓친 건 대책과 방도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권력과 정부의 ‘의도적인 방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카드 사태가 그렇고, 저축은행 사태가 그랬다. 동양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부실이 썩고 곪아 밖으로 터져 나온 뒤에야 뒤늦게 법석을 떠는 게 반복돼 왔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얼마 전 국회에서 “저축은행 외에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하지 못했다. 이 정권에서는 이 문제를 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지금까지 당국의 직무유기를 솔직히 인정한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그 해법이 과거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는 거다. 말로는 부실 위험을 철저히 점검하겠다고 하면서 “더 이상 문제 될 기업은 없다”고 선을 긋고, 은행들이 갑자기 자금난 기업의 사채 발행에 보증을 서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결국 부실 폭탄을 뒤로 떠넘기는 것 외에는 뾰족수가 없다는 고백이 아닐까 싶다. 청와대야 정권 임기 안에 동양 사태 같은 골치 아픈 일을 더는 만들지 말라는 취지일 테니. 일단은 숨이 붙어 있는 기업은 살려 놓고 보는 게 가장 안전하고 손쉬운 방법일 게다. 이런 식이라면 권력과 관료, 채권단 모두 ‘왜 내가 악역을 하느냐’는 공범 심리가 작동할 게 뻔하고, 선제적 구조조정은 또다시 말의 성찬에 그칠 뿐이다.

 기업 부실의 양상은 다양하다. 때맞춘 마중물이 위기 극복의 보약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론 자생력만 떨어뜨려 더 큰 부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시장과 채권단, 정부 가운데 누가 주도하는 게 합리적이냐는 질문도 딱히 정답을 찾기 힘든 문제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논란이 있지만, 우리의 산업·금융 생태계는 시장 주도의 자율적 구조조정이 매우 힘든 구조다. 미국처럼 기업 정보와 가치가 투명하게 시장에서 유통되고 곧장 평가받는 시스템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 하나가 죽고 사는 문제에도 늘 정부의 책임론이 제기되고, 당국의 ‘투명하고 합리적인 관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일 게다. ‘왜 강덕수는 죽이고, 박삼구는 살려주냐’는 시장의 의구심에 대답해야 할 책임도 관치의 몫이다. 하지만 어설픈 관치는 권력과 관료들의 잇속을 챙기는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기업과 금융사에 승리한 권력의 낙하산들이 투하되고, 모피아는 그 틈새에서 그들만의 인력 카르텔을 사수하는 모습을 보면, 과거의 적폐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읽기는 힘들어 보인다.

 사실 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국가 주도로 산업·금융 생태계를 완전히 재구성한 기억이 있다. 그런 식의 구조조정은 더는 유효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정부 당국자가 더 망할 곳은 없다고 했으니 일단 믿어볼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 부담과 알리바이 때문에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에 모르핀을 투여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고백하는 게 더 낫다.

 노키아가 몰락한 뒤 핀란드 경제의 충격 흡수 과정에 대한 말들이 많다. ‘절대 기업’이 사라진 자리에서 벤처 생태계가 꽃피었다는 해석들이 나온다. 망해야 사는 게 기업 생태계다. 음습한 정치 논리와 어설픈 관치로 기업을 좌지우지하던 때는 지났다.

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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