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저자
며칠 전 영화 <변호인>을 봤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대통령 노무현의 그림자를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배우 송강호에게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리적 결단은 어려웠던 시절 먹고 도망간 돼지국밥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논란의 여지는 없다. 양심의 소리를 따르면 된다. 하지만 국가보안법과 연루된 무고한 학생을 돕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에는 내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무도 하지 않으니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변호인’의 송강호가 내린 선택은 감동적이다. 하지만 시대정신에 눈뜨고 양심의 소리에 응답한 그의 모습이 2주 동안 6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극장으로 달려간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욕망을 양심과 양립시킬 수 없던 시대상황은 보는 것만으로도 환멸을 불러일으킨다. 정부가 최소한의 ‘질’을 갖추지 못하면 시민은 작은 양심을 지키는데도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국가란 국민이다”란 당연한 말을 용기를 갖고 외쳐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품격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만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란 최소한의 품격이 지켜지는 사회다.
얼마 전부터 <제이티비시>(JTBC) 사장 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9’을 휴대전화로 보기 시작했다. <엠비시> 뉴스를 봤는데 논란이 된 민주당 의원 양승조의 발언이 조금 나오다 잘려버리고 여당의 흥분한 반응이 두 꼭지 연달아 보도되는 것을 본 다음부터다. 뭐라고 말했는지를 알지 못하니 왜 난리를 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같은 사안을 다룬 <제이티비시> 뉴스를 봤다. 양승조가 손석희와 전화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엠비시>의 문제는 이념적 성향이 아니라 기자와 매체의 ‘질’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언론의 ‘질’은 곧 언론의 ‘품격’이다. 품격 없는 언론을 접하다 보니 내 품격도 함께 추락했다.
얼마 전 <경향신문>이 인용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제이티비시>는 신뢰도 면에서 <엠비시>와 <에스비에스>를 앞질러 3개 지상파와 4개 종합편성 채널 중에서 2위를 차지했다. 특히 1위를 차지한 <케이비에스>마저 30대에서는 미세한 차이로 눌렀다. 규모가 작고 인력이 적으며 역사도 짧은 제이티비시가 엠비시와 에스비에스보다 더 신뢰를 얻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정부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삼성 정도의 대기업은 뒤에 있어야 하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슬픈 일이다. 정치의 퇴행을 막고 있는 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언론이 아니라 차가운 자본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이념’ 대신 ‘품질’과 ‘품격’을 따진 결과다.
선거철이 되면 여당과 야당은 모두 중도로 수렴한다. 투표를 할 때쯤엔 두 당의 정책 차이는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정당과 언론은 모두 본색을 드러낸다. 정치와 언론의 ‘품질’은 떨어지고 ‘품격’은 사라진다. 사실은 사라지고 선동만 남는다. 우리는 북한 김정은의 눈썹이 왜 없어졌는지 논하는 공중파 뉴스를 봐야 한다. 관점 대신 입장이 논조를 정한다. ‘파업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란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이 신문을 가득 채운다. 결국 이념마저 사라지고 이익만 남는다. 본질이 사라진 빈자리를 마침내 자본이 비집고 들어온다. 공적 품격이 바닥까지 내려왔다는 증거다. 이렇게 공적인 품격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는 사적인 품격도 유지되기 어렵다. 그 사적 품격을 자본이 지킨다. 자본이 사회적 품격을 위한 최후의 희망이 된 사회, 참 비루하다.
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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