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대형마트에 가면 나는 꼭 주류 코너에 가 본다. 술을 좋아해서만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 갔다가 슈퍼마켓 주류 코너에 진열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술을 보고 무척 부러웠다. 한국은 언제쯤 이렇게 될까. 그 뒤부터 마트나 백화점의 주류 코너는 내게 세계화의 척도로 다가왔다. 실제로 6~7년 전부터 주류 진열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맥주였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맥주들, 필스너, 에일, 밀맥주…. 대형마트들끼리 경쟁하듯 새로운 맥주들을 들여다 놓았다. 책에서만 보던 유명 맥주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파는데 마셔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때는 밀맥주에 꽂혀 진열된 밀맥주를 상표별로 다 사서 쟁여놓고 마시기도 했다.
그에 반해 위스키, 럼, 보드카 같은 독주, ‘스피릿’이라고 부르는 증류주 코너는 변화가 더디다 싶었는데 며칠 전에 들른 한 대형마트의 주류 코너에서 눈길을 끈 건 럼과 테킬라였다. 그동안 한국에서 럼은 ‘바카디’라는 브랜드 일색이다시피 했는데, ‘하바나클럽’이 놓여 있었다. “친미 국가에 반미의 술이 들어왔네. 너 이 술 모르지?” 같이 간 친구에게 아는 체를 좀 했다.
바카디나 하바나(아바나)클럽 모두 쿠바에서 생산하던 럼이었다. 그런데 카스트로의 혁명이 일어난 뒤 바카디는 주인인 바카디 가문이 푸에르토리코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반면 하바나클럽은 주인만 망명한 채, 공장은 혁명정부가 인수해 생산하면서 프랑스의 대형 주류회사와 합작까지 했다. 카스트로가 죽도록 미웠던 바카디는 하바나클럽의 주인에게 상표권을 사서 푸에르토리코에서 하바나클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쿠바와 사이가 나쁜 미국에선 바카디가 만든 하바나클럽이, 다른 나라에선 쿠바산 하바나클럽이 팔리고 있다.
한국에 상륙한 하바나클럽은 어느 것일까? 쿠바산이었다. 쿠바 정부와 합작한 프랑스 주류회사가 들여온 거였다. “이 정도는 알고 마셔야 하지 않겠어?”
테킬라도 종류가 늘어 100% 아가베 테킬라도 두 상표나 진열돼 있었다.(‘아가베’는 테킬라의 원료가 되는 용설란이다.) 한국의 술 수입 규정이 이상해서 2010년까지 100% 아가베 테킬라는 수입될 수 없었다. 대신 아가베 원액 51%에 시럽 따위를 섞은 테킬라믹스토가 들어왔다. 2011년 규정이 바뀌어 100% 아가베 테킬라가 들어올 수 있게 됐는데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테킬라 브랜드는 여전히 테킬라믹스토만 팔고 있었다. 이런 건 소비자들이 잘 모르고 테킬라믹스토를 계속 사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지난해 보드카, 럼, 테킬라, 진의 국내출고량이 전년에 비해 31% 늘었단다. 이 술들이 위스키보다 싸고, 칵테일 해 마시기 좋아서란다. 기사엔 젊은 세대가 술을 양보다 스타일로 즐기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덧붙여놓고 있었다. 주야장천 폭탄주만 마시던 우리 세대와는 다르구나. 아무튼 다양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위스키 코너엔 ‘몰트위스키’ 진열대가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은 두세 종류만 있었지만 싱글몰트위스키 소비 추세에 비춰 보면 곧 늘어날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맥캘란을 편의점에서 판다는 기사를 엊그제 봤다. 한국의 술꾼들이 귀한 술이라며 맥캘란을 마시기 시작한 게 한 5~6년 된 것 같은데 참 빠르다.
그럴 거다. 술 같은 기호품의 세계화는 어느새 이렇게 코앞에 왔다. 20년 전 미국 마트의 주류 진열대 앞에서 느꼈던 부러움은 이제 남의 일이 됐다. 배부르니 딴소리하는 걸까. 돌이켜보니 정말 부러운 건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빈부격차, 행복지수, 자살률, 정부지출 중 사회보장비 비중, 차별 등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이 최하위 수준인 게 한참 많은데….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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