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
그것은 힘깨나 쓴다는 끗발의 증표다. 승자의 전리품이며 연줄의 상징이다. 강자에 접근하려는 원초적 욕망을 채워주는 동시에, 권력의 심장부에 근접해 있다는 환상도 심어 준다. 주는 쪽에서 보면 그것은 고강도로 농축된 환심을 싼값에 살 수 있는 고마운 존재다. 가격대비 최고효율의 선심을 제공하는 훌륭한 선물이다. 받는 쪽도, 주는 쪽도 그것의 사용가치보다 상징가치에 주목한다. 그러니 부품의 정밀성을 따질 이유가 없다. 그저 봉황 문양 또렷하고 대통령 이름 석자 선명하면 족하다. ‘청와대산 대통령시계’가 끊임없이 생산·유통되는 이유다.
시초는 박정희시계였다. 새마을지도자들에게 돌릴 선물이었다. 이후 전두환시계, 노태우시계가 속속 제작됐다. 김영삼시계엔 ‘대도무문(大道無門)’ 이 새겨졌고 김대중시계는 노벨상 수상을 기념했으며, 노무현시계엔 ‘원칙과 신뢰, 새로운 대한민국’이란 문구가 들어갔다. 이명박시계, 박근혜시계도 대열에서 빠질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시계가 만들어져 ‘존함시계’란 이름으로 호명됐다. 이런 유구한 전통 덕분인지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기념 손목시계도 한국에서 제작됐다.
권력을 향한 비루한 욕망을 그것만큼 선연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손목에 휘감기는 순간, 그것은 승자 편에 속해 있다는 자족과 패자 쪽이 아니라는 안도를 동시에 제공한다. 손목을 휘저으며 과시하는 순간, 마치 손에 권력을 쥔듯한 착시를 만들어내며 허세로 표출된다. 그렇다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부박하다 탓할 필요 없다. 그것은 본디 권력의 필요에 따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 것이므로, 따지자면 권력 탓이다. 그게 어디 수요가 있다고 아무나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인가.
“선물 다 받으셨죠. 잘 사용하시고 잘 활용하셨으면 좋겠다. 원외에 계신 분들이 어려운데, 꼭 해달라고 하셔서 (제작했다) 6월4일 (지방선거에서) 잘 안 되면 우리 말마따나 개털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의원과 당협위원장에게 박근혜시계 10개씩을 선물한 것을 두고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한 말이다. 민망할 정도로 조악하지만 너무도 노골적인 여당 사무총장의 발언은 시계 배포의 목적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필시 지방선거를 겨냥해 지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유권자들에게 배포될 것이다.
조지 부시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시절, 미국 뉴욕의 거리에서 ‘부시 퇴임시계(Bush Countdown Clock)’를 10달러쯤에 구입한 적이 있다. 카드형 열쇠고리 형태의 이 기이한 시계는 부시의 얼굴과 함께 부시가 퇴임할 때까지 남은 시간을 몇일, 시, 분,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표시해주는 제품이었는데, ‘악몽은 머잖아 끝날 것’이란 문구도 적혀 있었다. 일방주의로 일관했던 부시 정권을 향한 통쾌한 야유였다.
연제욱 청와대 비서관이 대선 직전까지 군 사이버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심리전단의 댓글 정치개입을 진두지휘했다는 <한겨레>의 실명 보도가 이어졌지만 당사자도, 청와대도, 박근혜 대통령도 오로지 침묵과 무시, 모르쇠와 무대응이다. 그게 아니라는 항변조차 없다. 군 검찰의 공소장에 명확하게 나오는 내용인데도 그렇다. 쇠귀에 경읽기가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야당의 특검 요구엔 기척도 없다. 청와대가 이렇게 나오면 달리 방법이 없다. 그저 세월이 약이거니 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리는 이들이 차츰 늘어갈 것이다. 박근혜정권의 오불관언이 계속되면 조만간 ‘박근혜 퇴임시계’가 제작되지 말란 법도 없다.
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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