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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첫밗

등록 2014-01-26 19:19

사람이 있다. ‘국어사전을 베고 잠들’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말밭을 발서슴하며 건져낸 열매는 <경마장에 없는 말들>, <토박이말 일곱 마당>, <우리말은 재미있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한겨레 말모이> 따위에 곱다시 담겨 있다. 우리말의 찾을모를 골라내는 재주는 여느 사람이 견줄 수 없을 만큼 땅불쑥하다. 시험만 보면 덜컥 붙었기에 신문과 방송 기자 노릇도 제법 했지만 길게 하지 않았다. 언론사 생활은 안정된 삶은새로에 유유자적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머리를 하얗게 배코치고 자릿내 진동하는 옷을 걸친 채 지칫지칫 술판을 전전했다. 술자리에 됫병 소주가 함께한 날이 여럿이었음은 물론이다. 말밭 매는 놉 노릇 하며 산 삶이 반나마는 족히 되었을 그는 억병의 나날을 더듬어 잡지에 ‘취생록’을 연재했다. 그 원고를 묶어 낸 <술통>을 뒤늦게 펼쳐 들었다.

발서슴(쉼 없이 두루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곱다시(그대로 고스란히), 찾을모(찾아 쓸만한 점이나 가치), 땅불쑥하다(특별하다)처럼 가리사니(사물을 판단할 만한 지각) 잡기 힘든 낱말이 여럿이다. ‘술통’을 읽으며 만난 살가운 표현 가운데 추려낸 말들이다. 머리를 빡빡 깎는 걸 ‘백구(호)치다’로, 자릿내는 지린내와 같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있던 내게 배코치다, 자릿내(빨랫감에서 나는 쉰 듯한 냄새)의 표기와 뜻을 밝혀주었다. 새로에(‘고사하고’, ‘커녕’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와 놉(품팔이 일꾼), 반나마(반 조금 지나게) 그리고 억병(한량없이 많은 술, 그만큼 마신 상태나 주량)은 오자일 것이라 여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 책을 샅샅이 훑게 한 꼬투리는 ‘첫밗’이었다. 세상에 이런 말이 있었나, 싶었으니까. 저자가 누구인지 왜 첫밗(일이나 행동의 맨 처음 국면)에 알아채지 못했을까. 시인이었지만 이렇다 할 시집을 낸 적 없는 그의 시집이 지난해 나왔다. 유고시집이다. 지난 토요일이 그의 2주기였다. 주인공은 장승욱, 그런 사람이 있었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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