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즐거워야 할 설이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확산되는 조류인플루엔자가 많은 귀성객의 발길을 막고, 신용카드사 개인정보 대량유출 사건의 파문은 잦아들 줄 모른다. 아르헨티나·터키 등 신흥국의 통화가치가 흔들리면서 세계 금융불안도 고개를 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기한 ‘통일대박론’도 설 연휴 얘깃거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좋은 뉴스는 아니다.
2011년 6월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한밤중에 그렇게 올 수 있다”고 했다. 이른바 ‘도둑통일론’이다. 그 얼마 전 북한 쪽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남쪽 당국자가 찾아와 매달렸다고 주장했고, 그 전해에는 연평도·천안함 사건이 있었다. 이 대통령은 도둑통일론을 통해 북한붕괴론을 반쯤 공식화한 뒤 뜬금없이 통일비용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통일항아리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한반도 위기 상황과 장성택 처형 등을 거치면서 이 도둑통일론을 업그레이드한 것이 통일대박론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여러 ‘통일 사업’이 추진될 것이다. 새누리당은 이미 통일연구센터를 출범시켰고, 김무성 위원은 통일경제교실 모임을 시작했다.
의도가 무엇이든 통일대박론은 박 대통령이 그동안 내놓은 여러 담론 가운데 비교적 성공적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대박’이라는 표현이 속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대국민 호소력이 있다. 통일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에게 ‘현재의 과제로서 통일’이 다가왔다면 그 자체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통일대박론은 도둑통일론처럼 허망하다. 우선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이 통일까지 가는 경로가 없다. 당위로서 통일, 구호로서 통일은 누구나 얘기할 수 있으나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된다. 구체성 없는 통일론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과거 여러 정권들은 통일방안에 고심했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작은 통일(경제공동체)에서 시작해 큰 통일(정치통합)로 나아가겠다’고 했으나 이제 ‘그냥 통일’로 후퇴했다. 대박보다 중요한 것은 대박이 되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통일대박론은 통일방안이 아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평화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남북 관계는 안정성이라는 면에서 냉전 시절보다 더 유동적이다. 그만큼 변수가 많아졌다. 평화를 유지·강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구상이 없다면 지난해 봄과 같은 위기 상황이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는 통일도 오지 않는다.
평화 없는 통일대박론은 북한붕괴론에 기댈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직설적으로 북한 붕괴를 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는다. 그는 최근 여러 차례 ‘북한 주민의 고통을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 정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주민들의 고통조차 해결할 수 없으므로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방법은 둘 가운데 하나다. 스스로 무너지거나 외부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평화에 대한 고민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실제로 정부 안 어디에서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평화통일은 쉽지 않다. 베트남은 전쟁을 거쳐 통일을 이뤘고, 평화적으로 통일했던 예멘은 이후 내전을 치렀다. 독일은 평화통일의 거의 유일한 사례다. 서독은 통일 직전까지도 동독붕괴론이나 흡수통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서독은 꾸준히 평화를 관리하고 민족 일체성을 강화하면서 통일 환경을 조성해 나갔다. 서독이 1960년대 후반 동방정책을 시작한 이후 동·서독은 90년 통일될 때까지 큰 위기를 겪지 않았다.
물론 평화 관리에 성공한다고 해서 꼭 통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통일이 되지 않으면 평화가 완성되기도 어렵다. 하지만 평화를 도외시한 통일 담론은 허구다. 과거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군사력으로 볼 때 전혀 현실성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폈다. 미군을 붙잡아두고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돼 있다. 평화라는 핵심 알맹이가 빠진 통일대박론은 북진통일론처럼 허상에 기초한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