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집필노동자
영부인은 ‘직업’일까. 장래 희망이 영부인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영부인은 정치인일까. 분명히 중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충북 옥천에는 ‘국모’라 불리는 전 영부인의 생가지가 으리으리하게 복원되기도 했으니까. 그럼 영부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대통령 관저의 ‘안주인’? 국모? 자국 음식 세계화를 위해 세금 쓰는 사람?(무려 769억!)
공식적으로 1월25일을 기점으로 대통령과 동거 관계가 끝난 프랑스 대통령의 ‘전’ 동거인인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가 엘리제궁을 떠나면서 현재 프랑스에는 영부인이 없는 상태다.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나 트리에르바일레르는 대통령의 동거인으로 그동안 영부인 ‘역할’을 해왔다. 법적 부인이 아닌, 대통령 ‘여자친구’의 공식적(실제와 상관없이) 부재는 영부인의 개념과 역할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으며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영부인의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가 2012년 당선될 때부터 ‘결혼하지 않은 대통령’의 사실적 배우자가 공식적으로 어떤 예우를 받고, 외교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심심치 않게 말이 나왔다. 미국 언론은 차마 영부인(First Lady)이라는 말을 쓰기가 꺼려졌는지, 프랑스 언론에서 자국의 대통령 동거인을 종종 ‘영부인’(Première Dame)이라고 지칭해도 영…여자친구(First Girlfriend)라고 부르기도 했다. 부인이든, 여자친구든, 세습 왕조국가가 아닌 공화국에서 이 ‘우두머리 영(令)’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
평소에 의구심 가득하던 직업(?) 혹은 역할이 바로 영부인이었다. 하버드 출신의 엘리트 변호사이며 현재는 내조에 충실한 전방위 슈퍼우먼, 미국의 미셸 오바마를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상”이라고 한다. 또한 계속 제 일을 이어가는 영국의 총리 부인 서맨사 캐머런(디자이너)을 두고는 “이제는 전문직 퍼스트레이디 시대”라고도 한다. 오늘날 영부인들은 패션 경쟁도 해야 하고, 내조의 여왕이면서 훌륭한 엄마이고, 각자의 전문성까지 갖춘,
중산층 여성의 역할모델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영부인이나 ‘전문직’ 영부인에 대한 관심 이전에, 대체 영부인이 왜 있어야 하는가, 묻고 싶다.
많은 국가에서 남성 지도자의 여성 배우자가 ‘공적으로’ 얼굴을 비치는 일은 보편적이다. 영부인의 존재는 다양한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결혼제도, 성별 권력, 성역할,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성 등. 유권자는 대통령을 뽑기 위해 투표할 뿐 대통령의 배우자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영부인이란 개념은 군주정치의 잔재로 청산해야 할 일종의 폐습이다.
여성을 ‘교환’하는 이성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배우자를 대동하고 공무를 처리하는 풍경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제는 드물지 않게 여성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그들의 남편인 ‘영부군(?)’은 미디어의 관심을 덜 받는 편이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남편은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난 적이 거의 없다. 곧, 외교 관행상 필요란 것은 지도자의 배우자라기보다, 구색을 맞출 ‘여성’이다. 아내가 없으면 딸이라도!
1년 전 독신 여성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아주 엽기적인 발상을 목격했다. 바로 ‘총리 부인’이나 ‘여성부 장관’이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지 않겠냐는 기막힌 관측이었다. ‘여성 파트너’에 대한 집착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다면 이 독신 여성 ‘덕분에’ 가부장제의 국가적 상징인 영부인의 개념이 흔들리리란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박근혜’라는 인물은 그 자신이 ‘영애-영부인-대통령’이라는 세 역할을 이미 한 몸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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