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원 작가·인터넷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사이버현실의 경계는 이미 무너졌고, 오히려 우리의 삶은 사이버공간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만일 사이버공간의 디지털자아가 지워지거나 조작된다면….
영화 <네트>에는 미모의 프로그래머 역을 맡은 샌드라 불럭이 네트워크상의 컴퓨터에서 수배된 성매매 여성으로 바뀌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녀를 도와주던 의사는 페니실린 알레르기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당뇨병 환자로 정보가 조작돼 약물 투입 사고로 죽는다. 백악관의 한 비서관은 에이즈로 조작된 검진 결과에 충격을 받고 자살하기도 한다. 20년 전 제작된 이 영화는 서두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스페인 가우디성당 앞입니다. 아직도 완성중인 불멸의 건축물, 여행 6일째입니다. 스페인국제공항에서 이곳 시간으로 6일 오전 5시 비행기로 떠납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이용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정보를 노출시킨다. 사이버공간에서는 특히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자랑할수록 호응을 얻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할지 모른다. 그사이 에스엔에스 사용자는 개인정보 사냥꾼의 덫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현대인의 노출증은 몇개의 에스엔에스만 훑어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말이다.
왜 그토록 인정해 달라고, 알아 달라고 애를 쓰는 것일까. 현대인의 불안이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의 지적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최근 영국의 한 지역에서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사진에서 사용자들이 집을 비웠다는 정보가 확인돼, 2주일 동안 12가구가 털렸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 에스엔에스에 여행지에서의 인증샷이나 휴가 계획 등을 실시간 알리는 것은 “집을 비웠으니 털어가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번 카드사들의 개인정보 관리체계는 그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사실 중소기업 같은 경우 초기투자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개인정보에 민감한 성형외과와 같은 업종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아니얼마 전까지 구글에서 주요 검색어만 입력해도, 줄줄이 개인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해커들이 이번 카드사태를 보는 시각은 왠지 떨떠름하다. 굳이 어렵게 보안시스템을 뚫지 않아도 되는 한편, 이 정도의 개인정보가 아무렇게나 유출되니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나 소나” 개인정보에 접근해 쉽게 범죄행위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고백이다. 그들만이 독식해야 할 먹잇감들이 어둠의 또다른 범죄자들에게 노출된다는 상황이 황당하고 달갑지 않은 것 같다.
개인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개인정보가 하나의 인격권, 자신의 가치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일이다. 할인권이나 쿠폰 등에 자신의 개인정보를 맞바꾸는 일도 삼가야 한다. 인터넷상에 아무렇게나 공개한 단편적인 정보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퍼즐처럼 짜맞춰져 먹잇감으로 수집되고 있다.
데이터를 이처럼 수집하고 짜맞추어서 행동거지를 예측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상황처럼 분석된 사람의 다음 행동까지 예측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면 수긍하겠는가. 쓸쓸한 이야기지만 모든 게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런 연구가 새로운 세계를 지배할 ‘숫자지식계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무서운 디지털사회의 현실을 무시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개인정보를 거리낌 없이 노출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곰곰이 생각해보시라. 언젠가는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등에 꽂히는 비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최희원 작가·인터넷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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