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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그물] 개전의 정이 없다

등록 2014-02-17 19:05

이명수 심리기획자
이명수 심리기획자
지난 13일 역사적인 재판이 두 개 있었다. ‘부림사건’ 관련자 5명에 대해 33년 만에 무죄가 선고되었고 강기훈씨는 ‘유서대필 사건’ 재심에서 23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그간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은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하다. 청춘의 세월은 지났고 몸과 마음은 오래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 국가라는 거인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이마와 가슴에 동시에 찍힌 불도장이니 쉽게 지워질 리도 없다. 그럼에도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 담당 재판부는 사법부의 과거 판결에 대해 어떤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다. 검찰은 유죄 취지를 그대로 유지했다. 피해자들은 그 무엇보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게 왜 어려운 일일까.

같은 날, 나도 개인적으로 작은 판결 하나를 받아들었다. 칼럼에서 폭력적인 공권력 집행을 비판했는데 허위사실 적시로 특정 경찰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항소심에서도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은 것이다. 재판부는 뉘우침 없이 자기변명을 되풀이한다며 내가 유죄인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물론 나는 수긍할 수 없었지만 재판 결과가 궁금해 전화를 한 큰형은 내게 충고했다. “그만하면 됐다. 더 뻗대지 마라. 국가의 위신이나 체면이 있는데 더 양보하겠니.”

일흔에 가까운 형에게 국가의 위신이나 체면은 그만큼 크고 절대적인 것이다. 큰형뿐이랴. 1980년대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몰렸던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가장 큰 고통은 ‘설마 나라에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간첩이라고 했겠어’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이었다. 그 고통은 수십년 후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은 이후에야 사그라졌다. 그러니 공권력을 집행하는 담당자들의 인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자기들 자체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하니 자기 오류를 인정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부림사건 당시 공안검사였던 한 변호사는 이번 무죄 판결에 대해 선배 판사들을 모두 소신도 없고 엉터리 판결을 한 것으로 몰면 어쩌느냐고 개탄한다. 과거의 법관들이 현장에서 진술을 듣고 겪었던 것을 현 사법부가 자기부정을 해선 안 된다고 점잖게 충고까지 한다. 법조인이 맞나 의심이 들 만큼 어이없고 억장이 무너지는 말이지만 왜 그런 행태를 보이는지 짐작은 하겠다. 그들에게 국가의 권위란 어떤 경우에도 우선하는 가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한다. 한 개인의 목숨이 걸린 일과 국가의 위신이 충돌할 경우 국가가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결정된 것은 번복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만일 틀린 결정이 있다면 국가의 권위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투다. 자기 신발에 흙 한톨 묻히지 않으려고 흙탕물 속에 몸을 담근 이의 등을 밟고 마차를 타는 어떤 이의 호사는 당연한가. 당연하지 않다. 그럼에도 국가가 무엇이관데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위해서 개인에게 보상이 불가능한 희생을 강요하는가.

판사나 검사는 ‘죄를 뉘우치지 않아서’란 표현을 관습적으로 남발한다는 느낌이다. 그 이유 때문에 죄가 더 무거워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자의적으로 느껴져서 그게 늘 못마땅했지만 만일 지금, 시민들로만 이루어진 상식과 인권의 법정에서 그 기준으로 당시 검찰과 경찰, 법원의 관련 책임자들에게 죄를 묻는다면 가중처벌이 불가피할 것이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자기부정 운운의 궤변 등으로 피해자들의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문지르는 짓이 개전의 정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겠는가.

이명수 심리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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