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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우크라이나의 교훈 / 오태규

등록 2014-03-04 18:40

오태규 논설위원
오태규 논설위원
1997년 1월7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마지막 새해 기자회견을 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러시아 기자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과거 동유럽 국가들을 포함해 확장되고 있는데 이것이 동북아 질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보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김 대통령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토가 조금 커진다고 해서 동북아 평화에 영향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지역에서 평화가 유지돼야 국제평화가 가능하겠지만 나토가 커지는 것이 동북아 평화에 당장 영향을 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17년 전의 일화를 굳이 소개하는 것은,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장면이 벌어질 수 있다는 기우 때문이다. 97년 무렵은 소련 붕괴 뒤 서방이 나토 동진정책을 본격화하고, 이에 맞서 러시아가 아시아·태평양 중시의 동방정책을 펴며 맞불을 놓던 시기였다. ‘거대한 체스판’이 요동치면서 우리의 외교·안보 환경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알 수 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고 다루는 외교·안보 당국의 자세와 언론사의 태도를 보면,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의문이다. 그저 우리와 크게 관련 없는 ‘아주 먼 곳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는 절대 남의 일이 아니다. 특히 외교·안보 면에서 반면교사로 삼을 점이 한둘이 아니다.

먼저,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끼여 있는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와 그로 인한 외교·안보 환경의 제약은 중국과 미국, 또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뒤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4년 제1차 오렌지혁명 때는 친서방, 2010년 대선 때는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섰고, 이번 제2차 오렌지혁명으로 다시 친서방으로 기울고 있다. 이번 사태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유럽연합과 경제협정을 중단하고 러시아의 경제지원을 받아들이면서 촉발되었다. 강대 세력 사이에 끼여 있는 나라가 다면적·입체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기우는 정책을 펼 때 생기는 위험을 우크라이나 사태는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의 한반도 정책에도 ‘나비 효과’를 불러올 게 확실하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격화할수록 러시아와 유럽연합뿐 아니라 ‘세계의 경찰’ 미국이 그쪽에 외교·안보·군사 자원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당장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4월 아시아 순방 일정뿐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뜻한다. 박근혜 정부가 3대 외교·안보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도 동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국제사회에 이들 정책을 힘들여 설명하고 지지를 구해도 큰손들이 깊은 관심을 표시할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옅어지면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반도 및 지역 문제를 끌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국제 환경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통일 대박’도 북한만을 쳐다봐서는 이뤄지기 어렵다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페이스북 @ohtak5

오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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