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재 문화지리학자 경인교육대 교수
치열한 투쟁으로 이룬 양성평등
여왕이 통치하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는 대영제국의 전성기였다. 남자들이 세계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개척하는 동안 영국 여성들은 가정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젊은 여성들의 최대 관심사는 연애와 외모 가꾸기였고 인생의 목표는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이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차를 마시며 사교생활을 즐겼던 상류층 여성들조차 남성의 소유물 취급을 받으며 내조와 육아에만 전념해야 했다. 재능있는 중산층 여성에게 허용된 직업은 교사와 간호사 정도였고 노동자계급 여성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했다.
1913년 영국 상류층이 운집한 경마장에 한 여성이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달라’며 트랙에 뛰어들었다가 왕의 말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참정권 운동을 벌였던 한 여성의 죽음보다는 지연된 경기 일정과 기수의 부상에만 주목하는 영국 언론과 남성들의 반응에 영국 여성들은 분노했다. 평소 여성운동에 무관심하던 평범한 여성들까지도 거리로 뛰쳐나와 ‘투표할 권리’를 외치기 시작했고, 전국적인 장례식 행렬에 동참한 영국 여성들은 계급·나이·인종을 초월한 동지애를 길렀다.
‘가정의 천사’에서 ‘거리의 투사’로 진화한 영국 여성들은 자신들의 권리만 주장하지 않았고 영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요구했다.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터로 떠난 남성들의 빈자리를 메우며 공장과 병원에서 일손을 돕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한 결과 영국 여성들의 법적·사회적 지위는 조금씩 향상되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영국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다. ‘내 딸, 내 식구’만 챙기기보다는 ‘우리 자녀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거리를 점령한 여성 선배들 덕분이었다.
남녀의 상대적 평등 정도를 잘 보여주는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 순위에서 한국은 2013년 136개국 중 111위로 세계 최하위권이었다.(북유럽 국가들이 최상위를 차지하는 가운데 같은 아시아 지역 안에서도 필리핀 5위, 싱가포르 58위, 타이 65위, 베트남 73위로 동남아 국가들의 순위가 높은 점이 인상적이다.) 좋은 학벌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알파 걸들이 늘어나고 한국 여성들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통계수치상 한국 여성들의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게 나타나는 역설적인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딸은 예쁘게 키워서 시집 잘 보내는 게 최고’라는 엄마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양성평등이 실현되기는 힘들 것 같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누리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풍경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와 닮았다. 평일 낮 시간, 백화점과 고급 음식점에는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쇼핑과 티타임을 여유롭게 즐기는 여성들로 가득하다. 반면 일과 가정,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의 고충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로 입증되고, 소득이 낮은 소외계층 여성들의 고단한 삶은 눈물겹다. 1948년 참정권을 쉽게 얻은 한국 여성들은 나의 권리, 내 가족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책무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100여년 전 경마장에서 꽃다운 청춘을 바친 에밀리 데이비슨을 비롯해 추운 거리에 나와 피켓을 들고 전단지를 뿌리며 단식과 투옥까지 불사한, 영국의 이름 모를 여성 참정권 운동 선배들을 기억하며 세계 여성의 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김이재 문화지리학자 경인교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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