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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수의 사람그물] 심심해야 좋은 사회다

등록 2014-03-31 18:45

이명수 심리기획자
이명수 심리기획자
아내가 좋은 꿈을 꿨다며 로또 복권을 사자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그러다 덜컥 1등에 당첨되면 어쩌려고?” 당첨금 거의 전부를 기부한 극소수를 제외하고 정상적인 삶을 유지한 사람이 없다는 국내외 로또 비화를 너무 잘 아는 사람답게 전액 기부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와 덕담을 반반씩 섞어 내가 다시 물었다. “당신의 품성이나 운발로 본다면 1등 할 가능성이 높은데, 일상이 충만해서 더 바랄 게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사람이 로또 복권을 샀다는 게 알려지면 좀 민망하지 않을까? 게다가 누군가 1등 할 기회를 뺏는 거잖아.” 아내가 복사꽃처럼 흐드러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봄날 꿈 얘기는 막을 내리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일상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다. 새로울 것도 없고 어떤 면에선 지루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로 일상성이 파괴되거나 흐트러지면 누구도 견뎌내지 못한다. 일상성의 확보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생존조건이기 때문이다. 어떤 부자들은 매일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정도로 소득이 늘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매일 행운이고 매일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이 크다고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일 비싼 차를 탄다고 아플 때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돈이 많아지면 일상성이 파괴되는 경우가 더 많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자극뿐이라 그렇다. 일상성을 돈으로 살 수는 없다.

치유의 핵심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일상성의 복원이다. 부당해고를 당한 해고자들이 몇 년씩 한뎃잠을 자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예전의 평범한 일상이다. 퇴근길에 동료들과 삼겹살을 구우며 일상의 고단함을 털어내던 시간, 아이를 목말 태우고 봄꽃을 보여주던 순간, 그런 일상의 시간들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게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라서가 아니다. 그런 일상성이 확보돼야 다음 수순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어서다.

우리의 정치와 정책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인식은 너무 이벤트적이고 기념비적이다. 결혼 후에도 매일처럼 자동차 트렁크에서 풍선 나오는 이벤트를 해줘야 여자가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남편. 강바닥을 파내고 ‘어마무시한’ 건물을 지어야 업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정책결정자 같다. 하지만 일상의 영역에선 많은 경우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결정이 가장 잘한 결정이다.

송파 세 모녀처럼 그렇게 삶을 마감하면 안 되는 자살자만 한 해 1만5000여명이다. 청소년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다. 각개약진해서 운 좋아야 겨우 살아남는 구조가 일상화된 사회다. 그런 상황임에도 복지정책의 중요성을 얘기하면 종북이라 매도하고, 그러다 북유럽처럼 심심한 사회가 되면 사는 재미가 없어진다고 훈계질한다. 기아선상에 있는 이들이 비만자의 당뇨병을 걱정하는 격이다.

어제 속마음 버스 개통식이 있었다. 서울시 힐링프로젝트의 하나로 정혜신 같은 치유자들의 내공과 임상 경험이 오롯이 담긴 버스다. 평소에 꼭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들(부부, 연인, 부모자식, 이웃, 동료, 친구 등)과 동승해서 서로의 속마음을 잘 주고받을 수 있도록 심리적 설계가 되어 있는 버스다. 이제부터 매일 저녁 그 버스가 누군가의 속마음을 싣고 반딧불이처럼 서울 시내를 돌아다닌다.

누군가와 속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건 일상의 관계를 지속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속마음을 나누다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로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런 순간의 희열은 봄의 꽃비보다 더한 축복이다. 대박은 그런 때 쓰는 말이다. 심심한 사회, 평범한 일상성이 확보되는 곳에서만 가능한 일들이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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