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통증은 우리 몸이 보내는 경고다.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쉬어야 한다고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고, 어깨 통증이 있으면 오십견이나 디스크까지 의심할 수 있다. 가벼운 통증도 그냥 두면 만성 통증으로 발전할 수 있고, 만성 통증을 방치하면 몸 전체가 서서히 망가진다. 통증으로 예고되지 않는 병도 많다. 피부에는 통점이 빽빽하게 분포돼 있지만 내장기관의 통점은 그 5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폐암과 간암의 발견이 늦은 것도 폐와 간에 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병으로는 염색체 이상으로 발병하는 ‘레시-나이언 증후군’이 있다. 이 병의 특징은 자해다. 아파야 그만두는데 아픔을 못 느끼니 입술이든 손가락이든 마구 물어뜯는다.
국가정보원의 ‘간첩혐의 증거조작 사건’도 애초 일종의 경고였다. 만성질환처럼 수십년 쌓여온 그늘 속의 문제들이 한순간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국정원의 병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증거조작 같은 불법도 예사로 저지르는 무법자 증후군이다. 엄정하게 법 절차를 지켜야 하는 법치국가의 수사기관에는 매우 위험한 병이다. 정보기관으로서도 국정원은 가진 힘을 대선개입 댓글 공작 따위에 오·남용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결정적일 때마다 중요한 대북 정보를 놓쳤던 국정원의 기능부전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검찰의 병은 그런 조작 증거를 아무런 점검 없이 법적 포장만 입혀 그대로 법정으로 배달한 데 있다. 기소권을 지닌 검찰을 인체의 판막이나 섬모 등에 비유한다면, 지금 공안검찰은 뻔한 위법조차 거르지 못하는 심각한 부전증 혹은 면역기능 상실을 앓고 있다. 이번과 비슷한 일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겠느냐는 당연한 의심이 사법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방치할 수 없는 중대 질환이다.
병이 이 정도라면 치료에 나서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다들 경고를 외면한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청와대와 국정원 앞에서 칼을 내리고 몸을 사린다. 검찰 특수부에 문제가 있어 중앙수사부 폐지 따위 개혁을 한다면, 역시 문제가 드러난 공안부에 대해서도 스스로 환부를 도려내는 게 마땅하다. 제 몸에 칼 대기도 싫고 수술을 해야 할 거대 권력도 겁난다면 치료는 불가능하다. 검찰의 존재 이유도 의심받게 된다.
국정원은 제 조직 살리겠다고 이른바 국가의 안보자산을 파괴하는 자해를 서슴지 않고 있다. 그동안에도 국정원은 증거조작의 정황과 증거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말을 바꿔가며 책임을 모면하려 했다. 대선개입 댓글 사건 때는 자체 개혁도 입에 올렸지만, 이번에는 그런 제스처도 없다. 뭐가 아픈 문제인지 도무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국가기밀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고 수사정보도 흘리더니, 정보기관의 생명이라는 정보망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까지 하고 있다. 자기 사는 것 말고 다른 아무것도 안중에 없이 날뛰는 국정원은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다. 자체 개혁 등 자가치유는 이미 물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이제 병을 고치자면 대통령이 나서야 하는데, 정작 박근혜 대통령은 오불관언이다. 지난달 10일 증거조작 논란에 유감을 표하면서 “문제가 드러나면 바로잡겠다”고 말한 뒤, 문제가 이렇게나 불거졌는데도 일절 입을 열지 않고 있다. 후속조처도 없다. 불리한 사안이니 손을 대서 문제를 키우지 않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대선개입 댓글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사건에서도 야당은 특검 하나 제대로 관철하기 어려워 보이니 큰 걱정도 아니겠다. 무엇보다 60%대에 이르는 높은 지지율이 대통령으로선 마음 든든할 것이다. 그런 호시절에 취해 있는 동안 병은 깊어만 간다. 손도 못 댈 지경이 되면 어쩌려고 이러는가.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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