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세포의 핵 속을 그려보자. 스물세 쌍 염색체가 있고 그 안엔 생명현상의 유전정보 가닥(디엔에이)이 꽁꽁 압축돼 담겨 있다. 모든 게 놀랍고 신비하지만 염색체 말단도 거저 있는 게 아니다. 의미 없는 염기서열이 반복되는 이곳은 텔로미어라 불린다. 그리스어로 끝(텔로스), 부분(메로스)이라는 뜻이다. 텔로미어의 기능은 오랜 수수께끼였으나, 유전정보가 복제되고 세포가 분열할 때 유전정보를 보호하는 ‘마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세 명의 과학자가 200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세포 분열 때마다 조금씩 줄어드는 텔로미어가 너무 짧아지면 세포 분열에 문제가 생겨 결국 노화로 이어진다는 사실도 알려져 더욱 주목받고 있다.
최근 미국 연구팀이 색다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 소년 40명의 가정환경과 텔로미어 길이를 분석했더니 열악한 가정환경의 스트레스를 겪는 소년들의 텔로미어 길이가 좋은 환경의 소년에 비해 눈에 띄게 짧았다는 것이다. 사회적 만성 스트레스가 텔로미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였다.
세계 생명의학 논문 정보 데이터베이스인 펍메드(PubMed) 누리집에서 검색하면, 비슷한 주제의 연구가 몇 년 새 부쩍 늘었음을 볼 수 있다. 우울증, 피로, 잠과 관련한 스트레스뿐 아니라 소득·교육 수준, 가정 안정성 같은 사회경제적 환경이 텔로미어 길이 변화와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는지 측정해 비교하는 연구가 많아졌다. 강한 경쟁자가 있거나 격리돼 사는 동물의 텔로미어 길이를 살피는 연구도 있다.
아직 분석 대상의 수도 적고 사회환경과 텔로미어 길이의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연구 결과는 부족해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상당하다. 그래도 측정된 텔로미어 길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려는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텔로미어 길이 연구의 의미와 한계를 두루 살펴야, 사회적 불균등이나 환경이 곧 생물학적 운명을 결정한다는 식의 또 다른 결정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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