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 논설위원
세월호 침몰사고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무참하게 죽어서 슬퍼하기도 하지만 어이없는 죽음을 만들어낸 그 속수무책의 무기력에 더 분노한다. 기울어진 배 안에서도 의연함을 유지한 채 끝내 오지 않을 구조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이들의 처연한 동영상이 사람들을 가슴 저미게 하고 자책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에 온 국민을 감정이입시키고 비통함의 밀도를 배가시킨 것은 바로 이 나라,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다. 이 점에서 박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도 과거 다른 사고들과 같을 수 없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위기에 강한 리더십’을 강점으로 널리 선전했다. 자신을 ‘위기 때마다 강한 리더’로 상찬하고, 문재인 후보를 ‘위기 때마다 회피하는 리더’로 폄훼하며 선명하게 대비시켰다. 박근혜 선대위가 대선 열흘 전인 2012년 12월10일에 한 공식 브리핑에서였다. ‘박근혜 리더십’의 현주소는 어떤가. 그렇게도 자랑하던 ‘위기에 강한 리더십’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하다. 위기에서 빛을 발한 건 ‘회피에 강한 리더십’이었다. 책임을 벗어던지는 데 그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회피의 정석’을 선보였다.
국민은 29일 대통령에게서 ‘사죄’란 한마디를 듣기까지 꼬박 2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내 책임’이란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과거로부터 겹겹이 쌓여온 적폐’와 ‘오래 고착화된 비정상적 관행’에 책임을 돌렸을 뿐이다. 1주일 전 국무회의에서 선장과 관료들을 질책했던 박 대통령은 이제 과거 정부를 탓하고 있다. 대통령은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아야만 분노한 민심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착각이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과가 국민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설 수 없음은 자명하다. 대통령이 아무리 ‘국가개조’를 다짐해도 국민은 대통령의 인식 구조가 먼저 개조되지 않는 한 바뀌는 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쇠고기 촛불시위로 지지율이 10%대까지 추락하자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들었노라며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상황을 모면하려는 임시방편이었을지언정 특별기자회견 형식을 통해 ‘뼈저린 반성’, ‘저 자신부터 자책’ 같은 표현을 쓰며 대통령 책임을 인정했다. 지금 박 대통령이 맞닥뜨린 위기는 그때보다 더 광범위하고 총체적이다. 치밀어오르는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울화병을 앓는 국민이 무수하다. 외신도 대통령의 처신에 혀를 차고 있고 국내 보수언론도 함부로 대통령 엄호사격에 나서지 못하는 판이다.
박 대통령은 사건 이후에도 57%를 오르내리는 지지율에 가슴을 쓸어내릴지 모른다. 물론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복원력이 뛰어나다. 악재가 튀어나오면 잠시 하락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곧바로 원래의 수치를 회복하곤 한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분노한 민심은 시간이 갈수록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에 표적을 맞출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몰아닥칠 성난 민심의 파고와 자신이 봉착한 위기의 실체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대통령 자신과 국민에게 크나큰 불행이다.
배는 복원력이 바닥에 도달하면 적은 힘에도 쉽게 뒤집힌다. 세월호도 그랬을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민심의 바다는 정치라는 배를 뜨게 하지만 성난 물결은 배를 뒤집어엎어 버리기도 한다. ‘박근혜 리더십’도 복원력이 몹시 허약해진 상태다. 박 대통령은 지금 거세게 물결치는 성난 민심의 파도를 거슬러 위태롭게 배를 몰아가는 위기의 선장이다.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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