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은 1816년 프랑스 군함 메두사 호의 침몰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섬뜩하다. 거센 파도에 흔들리는 뗏목의 앞부분에는 주검들이 널려 있다. 공포와 절망의 검은 바다는 오른쪽 저 멀리에서 나타난 배를 발견하면서 희망의 빛으로 바뀐다. 환호 아래서도 죽은 아들을 안은 노인은 망연자실해 있다.
세네갈 식민지 개척이라는 막대한 이권을 안고 출항한 메두사 호의 선장은 25년간 배를 탄 적 없는 퇴역 장성이었다. 그는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고 선장이 됐다. 미숙하고 무능했던 선장은 암초를 피하지 못했고 배는 가라앉았다. 고급선원과 고위관료들은 구명정에 탔지만, 하급선원 등 149명은 배의 잔해로 급히 만든 뗏목에 의지해 거친 바다를 표류해야 했다. 15일 뒤 구조돼 살아난 사람은 10명뿐이었다.
제리코의 그림은 굶주림 끝에 살인까지 벌어졌던 그 15일간의 현장을 눈앞에 보듯 되살려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뗏목까지 만들어 그린 그림은 사고 3년 뒤 세상에 나와 경악과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기억은 더 끔찍하게 재생된다. 이제는 즉시다. 세월호의 단원고 아이들은 침몰 직전 15분간의 동영상을 남겼다. 차마 끝까지 보긴 어렵다. 한참씩 쉬어야 한다. 아이들의 마지막 카톡 문자도 있다. 배가 기울어지던 아침부터 물밑으로 가라앉기까지 세월호의 모습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화창한 대낮에 아이들을 가둔 배가 사라지는 동안 해경을 비롯한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참혹한 현장의 목격자다.
세월호 침몰이 다른 사건·사고와 다른 점도 여기 있다. 사고 원인과 양상만 보면 대형 참사들은 놀랍도록 닮았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는 부실 설계와 무리한 증축공사 따위가 원인이었다. 두어 달 전부터 조짐이 있었고, 사고 당일에는 오전부터 굉음과 함께 건물 일부가 내려앉았다. 그런데도 백화점은 영업을 강행했고, 사고 직전 대피 안내도 없이 사장과 임원들만 빠져나왔다. 안전점검 부실, 부실공사, 과적 등이 원인이었던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도 비슷한 원인이 나열되는 이번 세월호 침몰 그대로다.
그래도 그런 사고는 이번과 다르다. 성수대교 붕괴에선 함께 사고를 당하고도 다행히 무사했던 의경들이 구조에 나섰고, 소방대와 119구조대도 바로 출동했다. 후임 서울시장은 한강다리들에 대한 전면 안전점검에 나섰다. 삼풍백화점 붕괴에선 잔해를 헤집으며 헌신적으로 생존자를 찾던 소방관들이 있었고, 기적적인 생환도 있었다. 적어도 사고 이후엔 국가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몇 년 뒤 외환위기에서 금모으기 운동이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정부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려 들지 않는 모습을 온 국민이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영웅담도, 감동도 없이 그저 집단적인 절망과 자책감만 남았다. ‘이게 나라냐’는 한탄은 국가와 정치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깊어졌다. 이민 가고 싶다는 말이 미래세대에게서부터 나온다. 대형재난에선 으레 나오던 성금 모금도 불이 붙지 않는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식의 쉬운 위로로는 풀리지 않을 정도로 상처들이 깊은 탓이겠다. 철없는 몇몇 남녀의 막말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만큼 우리 집단 목격자들의 트라우마는 심각하다. 이제 다시 국가적 위기가 닥친다면 힘을 모을 수나 있을까.
출구전략이나 일상으로 돌아갈 필요를 지금 섣불리 거론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사건은 시간이 지난다고 충격이 덜어질 일이 아니다. 지방선거 직전 ‘대안을 갖춘 사과’로 돌파하겠다는 따위 얕은 계책으로 붕괴한 신뢰가 복구될 리도 없다. 그런 식으로 상처를 덧내다가는 정말 나라가 망하게 된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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