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어른인 것이 미안합니다.” 세월호 참사의 자초지종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한마디다. 아직 채 피어보지도 못한, 꽃다운 학생들의 어처구니없는 희생이 오로지 그들보다는 한 세대 먼저 태어난 어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어른 된 자 누구나 참담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영향력 있는 신문과 방송들이 이와 같은 국민적 정서를 크게 부각시키는 것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보도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니, 누구 책임이 더 크냐 작으냐를 따지지 말자” 또는 “책임 문제는 나중에 따지고, 우선은 수습부터 힘쓰자”는 논리에 말려들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어른이 모두 ‘범인’이라는 말은 ‘범인’이 누구인지 굳이 따질 것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모두들 ‘내 탓이오’를 외치다 보면, 정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부각되지 않는 이치와 같다.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 곧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여당의 책임자들은 국민적 애도와 자책의 분위기를 방패로 삼아, 책임 추궁을 피하고, 정치적 위기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언론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언론이 만일 ‘어른이라 미안하다’는 국민 정서와는 별도로, 이번 참사의 최고 책임자가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줄기차게 부각시키면, 사회개혁을 위한 에너지로 작금의 애도 분위기를 활용할 수가 있다.
하지만 자책에 빠진 국민 정서를 빌미로, 대통령에 대한 야당의 정당한 책임 추궁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정치개혁, 사회개혁의 길은 더욱 멀어진다. 그런데 ‘조중동’ 중심의 보수언론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조짐이 벌써부터 보인다. 지난 7일치 <조선일보> 사설이 그 사례다. 사설은 “(이번 참사에) 지금의 야당을 포함한 역대 정부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다. 많은 국민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이런 사정은 알고 있다”며 “야권이 국민의 분노를 잘못 짚어 (대통령 공격의) 정치 수단으로 삼으려다간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수언론들이 이와 같이 마음 놓고 야당을 겁박할 수 있는 것은 자책에 빠진 국민 정서가 매우 탄탄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인 것이 미안하다”는 자책의 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미안한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순히 “자기 혼자 살려고 도망친 선장도 어른이니, 어른인 것이 부끄럽다”라는 대답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참사가 일어난 뒤 어른으로서 내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대답은 나도 이제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결심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자책의 흐름을 자기 성찰과 사회개혁의 동력으로 결집시키는 것이 바로 언론이 마땅히 할 일이다.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주최로 며칠 전 저녁 서울 대한문 앞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회 미사’에서 소설가 지요하씨는 자작시 낭송을 통해 ‘왜 미안한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오늘의 야만적인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 또한 이용당하거나 무관심하였기에, 또는 용인하였거나 직간접으로 관여하였기에 미안하다”는 구절이다.
이와 같은 성찰은 “그래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도올 김용옥의 권고는 “거리로 뛰쳐나와라”는 것이다. 깨어 있는 소수의 언론이라도 이와 같이 ‘미안함’이 자기 성찰로, 그리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발전해가는 용기 있는 외침을 열심히, 진지하게 보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왜 미안해하는가를 올바로 인식하기에 이르면, 우리 사회는 보수언론들의 장단에 더 이상 놀아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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