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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박근혜의 언어 / 길윤형

등록 2014-05-15 18:42

길윤형 도쿄 특파원
길윤형 도쿄 특파원
지난해 9월 일본에 부임해서 가장 놀란 것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언론 노출 정도였다. 온종일 일본의 소식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특파원 신분이기에 책상 옆에는 늘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의 종합 채널이 켜져 있다. 아베 총리는 국회의 여러 위원회에 불려 나와 여야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수시로 열리는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총리 관저에서 즉석으로 이뤄지는 ‘부라사가리’(즉석 기자회견)에서도 답을 했다. 일본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자신의 입으로 주요 정책에 대해 설명을 하는 모습이 좀처럼 국민들 앞엔 나서지 않는 우리 대통령과 비교돼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거대한 연극이야. 미리 질문지를 주잖아.”

자주 어울리는 일본의 시민단체 관계자들에게 이 같은 의견을 말하니,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원전, 평화교육 등의 문제 해결에 늘 바쁜 노히라 신사쿠 피스보트 공동대표가 그랬고, 오랜 시간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야노 히데키 ‘강제연행·기업책임 추궁 재판 전국네트워크’ 사무국장도 그랬으며, 센다이의 반핵 활동가 아오야기 준이치도 비슷한 말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들은 “한국은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뒤엎은 경험이 있지만 일본은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 민주주의의 활력을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한국이 앞서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던 것 같다.

생각이 바뀐 것은 이번 세월호 사태가 터진 뒤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세월호 사고 이후 한달이 지나도록 주권자인 국민 앞에 나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대통령의 발언은 ‘계란 라면’ 발언으로 유명세를 탄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지거나, 정해진 원고를 읽은 뒤 질문을 받지 않거나(2월25일 취임 1주년 담화), 민감한 질문은 알아서 피해가는 ‘기레기’들의 협조(1월6일 새해 기자회견)를 통해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그런 거대한 장막 속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대표자가 사회 전체가 맞닥뜨린 이 도저한 슬픔과 무력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우리가 옳다고 믿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질문지가 미리 전해진다고는 하지만 일본 국회에서 이뤄지는 야당 의원들과 총리의 토론은 간단치 않다. 한 예로 지난 1월31일 예산위원회에서 오카다 가쓰야 민주당 중의원 의원(전 외무상)과 아베 총리 사이의 질문 공방은 무려 1시간2분(이날 토론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에 이르는 치열한 것이었다. 오카다 의원은 아베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의 핵심인 “식민지배와 침략” 부분까지 계승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아베 총리가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선 끝내 자신의 입으로 답하지 않자, 그는 무려 네번에 걸쳐 이를 거듭 물으며 아베 총리를 압박했다. 일본 국민들은 아베 총리가 순간순간 짓는 미세한 표정과 몸짓의 변화를 통해 자신들의 대표가 특정 사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박 대통령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가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 사실상 온 국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실로 오싹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꽃 같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침몰하는 배를 밖에서 구경만 했던 해경에 대해 박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 앞에 맨얼굴로 나서 이에 성실히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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