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채 일본게이센여학원대 국제사회학과 교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드디어 자신의 패를 던졌다. 아베 총리는 15일 안보간담회 보고서를 비장하게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한정적 인정과 국제연합(유엔)의 결의에 기반을 둔 다국적군 등 집단안전보장의 참여를 제안하였다. 아베 총리는 세계의 분쟁지역에 일본이 다국적군으로 참여하는 집단안전보장에 대해서는 채택 거부를 명확히 하였다.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은 ‘일본 주변지역의 유사사태에 한정한 무력허용’임을 역설하였다. 진정 그러할까?
제1차 아베 내각은 헌법 9조를 폐기하는 개헌 구상을 내놓았지만,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고 결국 실각에 이르렀다. 제2차 아베 내각은 2014년 2월 양원 3분의 2 찬성에 의한 헌법 개정 발의안 96조를 개정하여 의회를 통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게임 중에 룰을 바꾼다는 비판을 받아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아베 총리는 내각의 헌법에 대한 공권적 해석권을 이용하는 변칙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집단적 자위권 승인을 추진하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승인하기 위한 아베 정권의 폭주는 무소불위다. 내각의 헌법 해석을 심사하는 내각 법제국이 일본의 헌법은 ‘집단적 자위권은 소지하되 9조에 의해 허용되지 않는다’는 기존 방침을 고수하자, 법제국 장관을 친아베파로 교체하였다. 또한 <엔에이치케이> 사장에 극우 인사를 임명하여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집단적 자위권이 실현되면 입헌주의와 민주주의, 전후평화주의의 근본질서가 무너지면서 장기적으로는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일어날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아베 내각은 작년 말에 특정비밀보호법을 강행처리하여 소위 체제안정의 곤봉도 준비해 두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월 방일 당시 미-일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검토를 환영 및 지지’한다고 표명하였다. 하지만 미 의회 조사국 및 <뉴욕 타임스> 등 미국 사회는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는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강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하고 있지만, 아베 정권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일의 동등한 동맹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베 정권의 행보에 대해서 오바마 정권과 미국 사회의 모순된 발언들은 ‘동등한 동맹론’의 과잉이용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연립여당 공명당의 지지기반인 창가학회는 내각 결정 방식이 아닌 헌법 개정 절차를 통한 집단적 자위권 승인을 요구하는 등 입헌주의 및 민주주의 파괴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결국 공명당도 절차상의 문제제기는 하지만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는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베 폭주의 큰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이처럼 무모할 정도로 보이는 아베 내각 및 극우의 폭주가 강력한 메이지 군사국가로 돌아가려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2011년 3·11 대지진 이후 3개 현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고, 제조업만으로 경제를 재생하기 어려운 한계에 직면해 있다. 엔화 약세에 기반한 아베노믹스가 가져올 불황의 탈출구는 역시 군수산업이다. 전쟁 이전엔 식민지정책을 통해, 전후엔 평화헌법의 틀 속에서 경제협력 방식으로 이익을 추구해왔던 재벌들이 이제는 무기수출의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 총리의 기자회견 다음날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간사장의 ‘차기 내각에서 다국적군 참여론의 허용’ 발언은 군수산업을 지향하는 보수세력의 폭주 및 재벌들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정부와 협의 없이 일본이 한반도 유사시 전쟁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제한된 집단적 자위권이라 하더라도 전후 동아시아 평화질서의 한 축인 일본의 평화헌법 9조가 사문화되고, 공동의 역사청산 없이 일본이 다시 재무장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우리의 대일외교 실패와 동아시아 전후질서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세월호 침몰사고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모순에 직면해야 하는 우리 사회는 이제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한국의 대외 및 대일 정책도 시대에 걸맞게 총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시점에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영채 일본게이센여학원대 국제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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