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
세월호 침몰과 함께 침몰한 게 많다. 우선 해경이 침몰했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지 못했다는 지탄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정부도 침몰하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금 우리 눈앞에 공영방송을 대표하는 <한국방송>(KBS)이 침몰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방송 기자 200여명은 21일 방송사 앞에 모여 ‘길환영 사장 퇴진촉구 기자협회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그의 사퇴를 요구했다. 길 사장은 자신이 청와대의 개입을 용인했다는 비판을 부인하면서 “노조의 불법 선동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고 기자들과 싸울 결의를 내비쳤다. 사장과 기자 모두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한국방송 사태의 발단은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기자회견이었다. 김 전 국장은 길 사장이 청와대 눈치만 살피면서 보도에 간섭했다며 사장 사퇴를 요구했다. 기자들이 그의 요구에 호응해 사장 사퇴를 요구하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한국방송 기자와 피디들은 보도에 대한 청와대의 입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청와대의 낙하산 사장이 관할하는 한국방송이 사실상 ‘청와대의 방송’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 아는 사실이라도 보도 책임자의 입을 통해 공표되면 정권의 언론장악을 공인하는 것이 된다. 김 전 국장이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대선 때 방송의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지배구조를 개혁하겠다고 공약했다. 언론정책에 대한 그의 유일한 공약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집권 2년째를 맞는 지금까지 대선 때의 방송개혁 공약에 관해 일절 언급이 없다. 언론정책에 관한 한 박 대통령은 신뢰의 정치인과는 거리가 먼 ‘거짓말 정치인’이다. 언론을 정권을 잡고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 ‘유신 언론관’의 신봉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언론정책이 “이명박 7년”이라는 조소를 받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 언론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가 지난 1일 발표한 2014년도 언론자유 순위에서 한국은 68위로 지난해보다 네 단계나 추락했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2011년 언론자유국에서 ‘부분적 자유국’(partially free)으로 낙제한 뒤 올해에도 언론자유국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대목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언론정책 성적표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무시하는 태도다.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다. 민주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될 자격을 갖췄는지 의심스럽다.
세월호 사건 이후 언론환경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 정권과 유착한 ‘친박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종할 수 있어 정권 유지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여론 조종에서 가장 중요한 한국방송의 기자·피디들이 권력의 시녀 노릇에 분노하고 반발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보도를 보면서 국민이 언론과 권력에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 덕분이다. ‘박근혜 사퇴’ 주장을 청와대 누리집에 올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1980년대 민주화 달성 과정의 언론과 분노한 국민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국민의 분노가 젊은 언론인들을 자극해 잠자는 언론을 깨운 인상이다. 꽃다운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족들의 분노의 힘이다. 어떤 권력도 저지할 수 없는 실종자 유족들의 분노의 힘이, 젊은 기자들을 분노하게 하는 촉매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언론이 권력의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언론소비자인 국민이 분노해 언론의 분노를 자극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세월호 참사가 우리 언론에 준 교훈이다.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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