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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눈 감고, 저 여우나 잡아라’ / 여현호

등록 2014-05-27 18:27수정 2014-05-28 07:43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게 걸린 현상금 5억원은 대단한 액수다. 지금껏 경찰이 내건 신고보상금은 5천만원이 최고였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1991년), 이형호군 유괴살인 사건(1991년), 신창원 탈주 사건(1999년),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2004년), 경찰관 살해범 이학만 사건(2004년)에서다. 그런 흉악범죄의 현상금이 고작 5천만원인 것은 경찰청 훈령에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훈령의 ‘범인검거공로자 보상금 지급기준’에는 중요 선거사범에 한해 5억원까지 보상금을 줄 수 있게 했지만, 3명 이상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나 조폭 두목 등 일반 범죄의 현상금은 5천만원까지로 묶여 있다. 그렇다고 유씨 부자에게 각각 5억원과 1억원의 현상금을 정한 것이 법규 위반은 아니라고 한다. 경찰청장의 재량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이례적인 것은 분명하다. 한 해 신고보상금 예산의 절반을 쓰는 것부터가 없던 일이다.

현상금 액수만큼이나 유씨 부자를 쫓는 모습과 규모도 대단하다. 밀행성이 우선인 여느 수사와 달리 검찰은 언론을 통해 유씨 부자 추적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다시피 했다. 유씨의 도피를 도운 구원파 신도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숨어 있던 집은 곧바로 공개됐다. 유씨 부자의 예상되는 변장 사진까지 배포됐다. 대역죄인을 잡는 양 사뭇 삼엄하고, 또 한편으론 보란 듯 떠들썩하다. 너른 들판에서 여우를 모는 모습 같다.

이제 유씨가 잡히면 클라이맥스다. 선거를 일주일도 남겨두지 않은 터이니 유씨 체포로 세월호 참사 수사는 대단원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고선 ‘이 여우가 온 들판의 농사를 망쳐놓은 놈’이라며 목을 걸고 온 동네를 다닐 것이다. 그러면 정말 다 된 것일까.

세월호 사건은 크게 두 부분이다. 선주의 탐욕과 선장·선원들의 비겁 탓에 승객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침몰’이 그 하나라면, 그 이후 구조와 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 재난대응체계의 총체적 부실로 죽지 않았어도 될 생때같은 목숨까지 사라져간 ‘또다른 참사’가 더 있다. 유씨와 세월호 선장 등의 행태가 천인공노할 일인 만큼, ‘이게 나라냐’며 온 국민의 가슴을 치게 한 국가의 책임 역시 엄중하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 대한 수사는 유씨 수사와 달리 종무소식이다. 해경에 대한 수사 얘기만 나오면 검찰은 입을 닫는다. “원칙에 따라 수사하겠다”는 응답은 사건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다. 수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하기는 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최종책임을 지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을 의식한 것인지, 코앞의 선거를 염두에 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렇게 한쪽엔 입 닫은 채, 다른 한쪽의 여우만 손가락질하며 쫓는다.

온 사회가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달려간다면 그 사회가 정상일 수 없다. 에릭 호퍼는 “증오가 맹신자들을 하나로 만든다”고 말했다. 유씨 일가를 증오하는 데만 빠져버린다면 그 역시 사이비 종교처럼 맹신이 된다.

그런 광풍과 맹신에 결코 빠져선 안 될 이들까지 흔들린다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유씨와 선장 같은 이에게 수백년의 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형법을 개정하자는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당장 연구하고 논의하겠다’며 맞장구치고 나선 대법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통령의 주장은 우리 형법의 기본 체계를 뒤흔드는 일이어서 입법자의 권한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설령 바꾸더라도 오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 ‘포퓰리즘적 주장’에 영합하는 것이 법원이 신뢰를 얻는 길은 결코 아니다. 되레 주인이 여우를 겨냥한다고 덩달아 나팔 부는 모습처럼 비친다. 대체 왜 이렇게 부박해졌는가.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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