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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진주만에서 / 김의겸

등록 2014-06-03 18:17

김의겸 논설위원
김의겸 논설위원
미 태평양사령부의 초청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둘러봤습니다. 야자수와 파도타기를 떠올렸건만 막상 마주친 건 빽빽이 늘어선 전투기와 군함들이었습니다. 만 전체가 거대한 무기고 같더군요. 사령부 벽면에 펼쳐진 지도는 지구를 6등분해 놓았습니다. 제일 큰 토막이 태평양사령부 몫입니다. “할리우드에서 발리우드까지, 북극에서 남극까지.” 한 장교는 자신들의 ‘영역’이 넓은 걸 이렇게 자랑하더군요. 면적뿐만 아니라 인구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 자부심이 마음에 걸렸는지 한 장군은 “우리가 소유하는 게 아니라고 부하들에게 매번 강조한다”며 자세를 낮추더군요. 제국을 경영하면서 터득한 지혜겠죠.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던가요. 바다 하면 태평양이고, 그 한가운데 진주만이 있으니 세계를 호령하기에는 최적의 요지입니다.

진주만은 1941년 12월7일의 침공을 끊임없이 되살리고 있습니다. 1000명 이상의 수병과 함께 가라앉은 전함 애리조나에서는 지금도 기름이 새나오고 있더군요. 과거의 분노를 오늘에 타오르게 하는 연료인 셈이죠. 공군기지 벽의 총탄 자국은 그대로 살려뒀고, 포연에 그을린 성조기는 아직도 타는 냄새가 날 듯했습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공습 당일치 신문을 계속 찍어서 팔더군요. 5센트짜리가 2달러로 올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기억의 대상이 일본은 아닙니다. 최정예 순양함 ‘포트 로열’의 함장은 “지금의 일본은 70~8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굳건한 동맹으로 연결돼 있다”고 하더군요. 대신 그 자리에는 중국이 놓여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과제 3개를 꼽아달라’고 주문하자 태평양사령부는 셋 다 중국 문제를 꼽았습니다. 동남중국해 영해분쟁, 중국의 사이버테러, 중국과 러시아의 합동군사훈련이죠. 전직 외교관은 노골적으로 “중국이 우리를 태평양에서 밀어내고 있다”고 투덜대더군요. 그는 오바마 대통령과 국무장관, 안보보좌관이 매일 아침 중국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하와이의 부동산은 중국 사람들이 싹쓸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와이키키 해변의 호텔들은 일본인 소유가 많았는데, 매물로 나오기가 무섭게 중국인들이 사들이고 있답니다. 그 덕에 하와이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유일하게 집값이 오른다고 하죠.

진주만에서는 뜻밖에도 우리 함정을 보게 됐습니다. 서애 유성룡함과 왕건함입니다. 세계 최대의 해상 군사훈련인 림팩에 참가하려고 입항한 겁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우리 해군들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도대체 누구와 싸우려고 대양을 건너왔는지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요즘 태평양의 파도는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미사일방어(MD)체제에 끼워넣으려고 어르기도 하고 윽박도 지르고 있습니다. 중국은 자신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일이니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게 당연하죠. 1962년 소련이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다 빚어진 핵전쟁 위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순양함 포트로열에는 토마호크 미사일을 쏠 수 있는 128개의 포문이 설치돼 있습니다. 갑판에 올랐을 때 마침 ‘그르렁’ 소리를 내며 포문의 뚜껑을 여닫는 연습 중이었습니다. 1991년 걸프전 때 바그다드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바로 그 무기입니다. 한여름의 열기로 달아오른 갑판 위였지만 오싹해지더군요. 한반도에서 불을 뿜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와이키키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구경했습니다. 거센 물살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균형감이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하와이에서 꼭 배워 돌아가고픈 덕목입니다.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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