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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삼백 목숨 위의 아홉 자리 / 이유주현

등록 2014-06-08 18:11수정 2014-06-09 12:01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기자들은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취재원들이 집 밖으로 나오기를, 검찰에 소환된 인사가 조사실 밖으로 나오기를, 여야가 예산안을 합의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일명 ‘뻗치기’다.

뻗치기는 통상 짜증나는 일이지만, 최근 눈물 나는 뻗치기를 경험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국정조사 계획서를 빨리 통과시키라며 국회에서 2박3일 농성을 벌이던 때였다. 야당은 청와대 불통을 상징하는 인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이름을 계획서의 증인 목록에 넣자고 했고, 여당은 “관행에 없다”며 거부했다. 기다림에 지친 가족들은 집회를 열었다. “의원님들아, 당리당략 논할 때 부모 가슴 썩어간다.” “관행대로 하다가 우리 애들 다 죽었다.” 그들은 아직도 찾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빨리 돌아와라. 엄마랑 집에 가자.” 가족들의 외침이 여의도의 하늘로 속절없이 흩어질 때 이를 지켜보던 의원들도, 보좌관들도, 그리고 기자들도 울었다. ‘정치’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눈물조차 닦아주지 못했다. ‘정치’가 미웠다.

며칠 전 진도에 다녀온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의원과 얘기를 나눴다. 그는 현장에 가 보니 정치인들이 할 일이 많았다고 전했다. 사고 직후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에서 만났던 다섯살 어린이는 여전히 아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이를 돌보고 있는 고모는 집에서 가까운 국공립 유치원에 보내면 좋겠다고 의원에게 털어놓았다. 경황 없는 실종자 가족들은 뭐가 필요한지 정부에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정치’는 절실했다. 정치인이라면 체육관에 발도 못 붙이게 했던 실종자 가족들은 이젠 외로움과 불안 속에서 정치인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국정조사 계획서가 본회의를 통과한 지 엿새 뒤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여당은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자”고 했고, 야당은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자”며 여권 심판론을 주장했다. 천막당사도 아니고 청와대에서 잘 지내는 대통령을 왜 불쌍히 여겨야 하느냐는 반론과, 야당이 과연 누구를 심판할 자격이 있느냐는 회의가 맞섰다. 결국 유권자들은 여야 어느 쪽에도 일방적으로 표를 몰아주지 않는 걸로 결론냈다. 논란은 있지만 여하튼 ‘무승부’였다.

야당은 선거전 내내 ‘조용한 선거’를 치르자고 했다. 당 지도부는 매일 의원들 카톡방을 통해 유세차량 사용 제한, 스피커 사용 금지 등을 당부했다. 그러나 팽목항에 다녀온 의원은 말했다. “의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기 전에, 당 지도부는 계란에 맞더라도 물병에 맞더라도 사고 직후부터 진도로 달려가 가족들과 함께했어야 했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야당 안팎에선 세월호 참사가 아니었다면 서울시장 선거조차도 위태로웠다는 말이 나온다. 광역단체장 9명을 얻은 야당은 300여명의 목숨을 딛고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핏값으로 얻은 처절한 승리다. 하지만 세월호 심판론은 2010년 지방선거 때 4대강 사업 심판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당시 4대강 심판론은 마른 나뭇가지에 그은 성냥불 같았다.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이번엔 아니다. ‘행동’ 없는 야당은 국민들에게 ‘기호 2번’이 찍힌 손수건 한장 건넨 정도다. 서복경 서강대 연구교수의 말처럼, 야당이 국민들의 아픔에 진정 공감했다면 심판투표 이전에 조의투표, 애도투표를 하자고 말했어야 했다. 늦진 않았다. 진정한 애도는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국민들 눈물을 멈추려면 일단 속시원히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분노는 아직 젖어 있다.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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