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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능구 정일우 신부를 추억함 / 정용철

등록 2014-06-09 18:11

정용철 서강대 교수
정용철 서강대 교수
지방선거가 있었던 아침 정일우 요한 신부님 영결미사를 다녀왔다. 자신의 장례예식을 축제처럼 즐겨달라는 고인의 뜻에도 불구하고 미사 내내 내 마음은 무겁고 어두웠다. 같은 대학에서 녹을 받아먹는다는 인연으로 심정적으로만 가깝게 느꼈을 뿐 실제로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다. 내가 귀국한 뒤 그는 늘 몸이 안 좋았고 가난했다.

능구. 그의 별명이다. 하동 정씨 정일우. 그를 아는 예수회신부 사이에도 요한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능구렁이 수백마리가 틀어 앉아 있는 듯하다 하여 그를 능구라고 부르기 시작했단다. 능구의 정수는 똬리틀기와 능청스럽게 자유롭기였다. 그는 철거민들의 삶으로 불쑥 들어가 똬리를 틀고 늘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는 수많은 민초들의 각박함과 악다구니를 특유의 천연덕스러움과 능글거림으로 위로했다.

그런 그가 살벌했던 1970년 초반 똘기 충만한 젊은 운동가 제정구를 만난 사건은 우연을 가장한 역사적인 부름일 것이다. 그의 이름, 일우처럼 하나의 우연은 마지막까지 그의 인생을 지배한 도도한 일관성이 되었다. 강론을 맡은 같은 서강대 교수인 박문수(이분의 삶도 정일우 신부 못지않다!) 신부가 처음 정 신부를 만났을 때, 그는 유신치하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가 몸에 휘감고 있던 메시지는 ‘Oh Korea! I am sad. The freedom of press is dying’(오 한국이여! 슬프다. 언론 자유가 죽어가고 있다)이었단다. 그 슬픔이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비통할 따름이다.

영결미사에서 조사를 맡은 손인숙 수녀. 평생 정 신부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담담하게(그리고 당당하게) 정 신부의 삶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한다. 첫번째 삶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시기. 처음 청계천 판자촌에서 사목을 했을 때로 짐작된다. 두번째 시기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저 함께하기를 실천했던 때다. 손 수녀는 그 상태를 무위도식이라고 표현했다. 그저 같이 뒹굴고 먹고 자고 떠들면서 함께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수녀는 처음 얼마 동안 몰랐다고 한다. 자기의 쓸모없음을 절절히 받아들이고 나서야 가난한 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그들이 필요했음을 고백했다. 실상 가난한 삶이 다른 삶보다 특별히 고귀하거나 빛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척박한 삶일수록 찌들고 종국에는 악만 남는다. 그 악만 남아 있는 생의 한가운데에서 악을 견디면서 함께 존재하기. 정 신부의 두번째 삶이다. 마지막 세번째 시기는 스스로가 악만 남은 가난한 사람이 되기였다. 환자로 보낸 마지막 십년. 손 수녀가 보기에 정 신부는 온전히 가난한 사람이 되어 일생을 마무리했다. 짜증도 부리고 소리 지르는 가난한 신부.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예의 그 도도한 일관성을 가난한 삶으로 완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조사를 맡은 고 제정구 선생의 부인 신명자씨는 정 신부의 삶을 한마디로 ‘몽땅’이라고 불렀다. 남김없이 모조리. 그렇게 살았다.

인도의 시바신의 몸이 왜 파라냐는 아들의 질문에 한 아버지가 세상의 독을 다 빨아들여 품어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정 신부가 살아간(아니 살아낸) 삶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찬란함뿐만 아니라 어두움과 상처까지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세상의 독을 온몸으로 빨아들여 푸르게 죽어간 정일우 신부님.

막걸리 한잔 걸치고 그가 생전에 애창했다는 ‘청포도 사랑’은 이렇게 시작한다.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어여쁜 아가씨여 손잡고 가잔다’

파랑새, 청포도, 그리고 청포도 사랑. 세상의 모든 푸른 것들이 세상의 독을 품고 훨훨 날아간 그를 떠올리게 한다.

정용철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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