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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위안부 문제, 그렇다면 법대로 하자

등록 2014-06-23 18:33수정 2014-06-23 23:03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전 외교통상부 동북아국장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전 외교통상부 동북아국장
전대미문의 폭로전에 의해 고노 담화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한-일 관계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버렸다. 일본의 검증 결과 발표를 보고 대일외교 최전선에 몸담았던 한 사람으로서 경악과 허탈감을 금할 수 없었다.

첫째, 25쪽이나 되는 방대한 발표 자료를 보고 놀랐다. 담화 문안의 협의 여부에 관한 내용이 될 것이라 했는데, 실제 발표 내용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시작된 1991년부터 아시아여성기금의 활동이 종료되는 2002년까지 10여년에 걸친 상세한 외교기록이었다. 담화의 검증이라기보다는 위안부 문제의 ‘백서’라고 해야 할 정도다. 검증이라는 명목으로 아베 정권이 그간의 억하심정을 전부 발산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둘째, 일본 측의 발표 내용은 일방적이고 균형도 결여되어 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별하고 편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 담화 내용에 관한 공식협의를 하지 않는다고 하자 일본이 ‘나중에 책임 전가하지 않을 테니 내밀히 협의하자’고 요청해온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나의 외교적 사실에 대해서 양측의 기록과 해석이 엇갈리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외교현안에 대해서 어느 한쪽의 기록만으로 검증을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셋째, 비밀이 해제되지 않은 외교기록을 실무자 사이의 의견교환은 물론, 외교장관회담과 정상회담의 대화 내용까지도 자세히 공개해버린 것은 생각보다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다. 앞으로 한-일 간에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할지 심히 우려된다. 그렇지 않아도 위키리크스 등으로 인해 외교현장의 교섭자들이 자신의 발언이 공개될 것을 우려하여 솔직하고 유연한 대화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데 민간 해커도 아닌 일본 정부가 스스로 폭로전에 나섰으니 가뜩이나 민감한 한-일 간의 외교교섭은 더욱 경직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번 발표를 통해 아베 정권은 외교적으로 마무리된 위안부 문제를 한국이 기존 입장을 뒤집고 또다시 들고나왔다는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각인시키려 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3월 일본에 대해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피해자 지원 조치는 한국 정부가 실시하기로 했다. 일본에 책임이 없어서가 아니라 도덕적 우위에서 대국적 결단을 했던 것이다. 대신 일본에 대해서는 진상규명과 후세에 대한 교육을 요구했고 그 결과가 5개월 뒤에 고노 담화로 나왔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외교현안으로서는 일단락되었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그 후에도 원칙적으로 이를 유지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성의 있는 대응’을 요구하는 것은 자칫 일본에 좋은 비판의 소재를 제공해줄 우려가 있다. 따라서 201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른 조치를 이행하는 것을 다시 한번 심각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는지에 관한 한-일 양측의 상반된 해석을 따져보기 위해 협정 제3조에 규정된 외교적 협의를 하거나 중재에 회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이 기존 입장을 뒤집는다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으며, 오히려 일본에 대한 더욱 강력한 카드가 될 것이다.

교통사고에 비유하자면 운전자끼리 얼굴 붉히고 씨름하기보다는 변호사를 통해 법 규정에 따라 담담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한-일 간에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너무나 감정의 골이 깊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더 이상의 감정의 대립을 막는 동시에 국제적인 홍보전에서도 우위에 서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외교적으로 ‘교섭’하는 것은 여러 가지 화근을 남길 수 있음을 이번 검증 결과 발표가 잘 보여주었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전 외교통상부 동북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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