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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쟁과 평화 그리고 평화권

등록 2014-06-24 18:14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의 포성은 한반도의 운명을 완전히 바꿨다. 전쟁은 생명과 삶의 터전을 파괴한다. 인간의 이성과 심성도 비틀어 버린다. 우리가 아직도 한국전쟁의 후유증이라 할 반이성적 선동과 사회분열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보라. 한국전쟁을 다룬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국가주의를 넘어 평화와 인권의 보편적 지평에서 6·25를 재조명하자고 호소하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번주엔 전쟁과 직접 관련된 날이 또 있다. 100년 전 1914년 6월28일, 화창한 일요일 오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살해되었다. 그것으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경험한 최악의 총체전이었다. 연합군과 동맹군 양쪽 전사자와 실종자가 도합 1767만명, 부상자까지 합치면 무려 3889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참전자 중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친 전쟁이었다. 민간의 ‘부수적 피해’ 역시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전쟁은 근본적 차원에서 인간의 생명, 안전, 행복을 박탈한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보아 전쟁의 참화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인권의 맨 앞자리에 오는 게 당연하다. 평화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즉 평화권은 이렇듯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권 담론에서 평화권은 아직 확립된 권리라 말하기 어렵다. 평화권을 전면에 내걸고 만들어진 국제조약을 찾기도 어렵다. 이 점은 인권과 평화의 상관성을 이해하고 희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한다. 왜 그럴까.

평화권은 역사를 통해 세 갈래의 흐름을 타고 만들어져 왔다. 첫째 흐름은 전쟁에 질서와 규칙을 부과하려는 움직임이다. 스위스 시민 앙리 뒤낭이 <솔페리노의 회상>에서 전시의 부상병을 치료하고, 구호차량과 병원을 공격하지 말고,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 주며, 민간인을 보호하자는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1864년 8월22일에 체결된 제1차 제네바협약이 올해로 150주년을 맞는다. 국제인도법 체계는 무력충돌 상황에서도 결코 유보되거나 제한될 수 없는 인간의 기본권을 규정한다. 국제인도법, 인권법, 난민법은 별개의 영역에서 작동하지만 상호보완적으로 간주된다. 제네바 출신인 루소가 쓴 <사회계약론>에 전시 인도주의 원칙이 이미 나와 있다. “전쟁은 보통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다. 교전 당사자들은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어쩌다 보니 서로 적이 된 처지다. 따라서 아군은 무기를 든 적군만을 죽일 권리가 있다. 적군이라 하더라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그를 죽일 권리가 사라진다. 더 이상 적국의 대리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인도법은 전쟁을 국가 간의 공식 영역에 한정하고 일반시민을 그로부터 분리시켰다. 국가들 사이의 ‘군사화된 분규’인 전쟁을 인도적으로 교화하고 순치하겠다는 목표를 가지지만 전쟁 자체는 국가의 궁극적 권한에 속한다고 본다.

평화권의 둘째 흐름은 기존의 인권으로써 평화를 해석한다. 이때 인권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 된다. 인권을 보장하고 실천하면 전쟁 발발 가능성이 줄기 때문에 집합적 수준에서 인간 존엄성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유엔 헌장 55조에 이미 이런 관점이 나와 있다. 인종, 성, 언어, 종교로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인권과 기본 자유를 보편적으로 존중하면 국제 평화와 친선에 필요한 안정과 안녕의 조건이 조성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입장을 계승한 세계인권선언에서도 인권을 보장하면 국내 평화와 개인의 인간존엄, 국제 평화와 집합적 인간존엄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즉 인권은 평화를 위한 보험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인과경로로 인권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말인가. 제일 유명한 설명이 이른바 ‘민주적 평화이론’이다.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국가들 사이에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설이다. 민주국과 독재국 사이의 전쟁에선 이 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냉전 종식까지 장기적 분석을 해 보면 이 가설이 큰 틀에서 입증된다. 민주적 평화이론의 아버지는 칸트라 할 수 있다. 그는 공화주의 국가들 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상했다. <영구평화론>이 나온 18세기 말의 공화주의는 오늘의 민주주의에 가까운 사상이었다. 이런 사유가 20세기 초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이어졌다. 그 후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공상과학 소설가였던 H. G. 웰스의 영향을 받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이 1930년대 이후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민주주의 체제의 시민들은 문화적, 사상적인 측면 때문에 무력을 동원하는 분쟁을 경원시한다. 또한 함부로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는 선거에서 축출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한다. 평소 민주적 의사결정 훈련을 한 것이 국제관계에 적용되는 점도 있다. 또한 무역과 통상이 활발해져 경제가 서로 연결·통합되면 국가간 무력충돌이 줄어든다는 가설도 있다. 전쟁보다 장사가 물질적 이익을 증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재산권의 보장이 평화로 이어진다는 자본주의형 평화론이다. 한 가지 더 있다. 국가들이 국제기구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비중이 늘어나면 그 역시 평화를 확대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둘째 흐름은 전쟁의 부재를 평화로 해석하는 소극적 평화론이며, 민주자본주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자유주의적 평화론으로 귀결된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민주·인권이 경험적으로 전쟁을 줄인다고 하면서도 전쟁 그 자체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진 않는다. 요컨대 시민적·정치적 인권과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세계 평화에 이롭다는 주장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인권과 평화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증진하려 노력하지만 ‘평화권’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는 않는다.

최근 ‘평화권’이 하나의 독자적 개념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평화권은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을 원하지 않고 적극적 평화를 원한다. 그것을 위해 무력의 위협이나 사용 금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인정, 평화를 위한 시위권리 보장, 군의 책무성 강화, 희생자들의 권리를 요구한다.

평화권의 셋째 흐름이 등장하고서야 비로소 ‘평화권’이 하나의 독자적 개념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비교적 최근의 경향이다. 초기엔 ‘인민들의 평화에 대한 권리’라고 불렀지만 요즘엔 그냥 ‘평화권’이라 칭하며, 개인과 집단이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권리로 해석한다. 평화권은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을 원하지 않고 적극적 평화를 원한다. 그것을 위해 무력의 위협이나 사용 금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정, 평화를 위한 시위권리 보장, 군의 책무성 강화, 발전권,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권, 희생자들의 권리를 요구한다. 국가의 무기거래를 엄격하고 투명하게 통제하고, 민간 보안업체에 대한 하청을 근절하며, 억압적 식민지배나 외세의 점령 그리고 독재에 저항하고 반대할 권리를 요구한다.

평화권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면 인권을 실행한 결과로서 평화가 온다기보다, 개인과 집단이 평화를 목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적극적 평화론이 가능해진다. 인간 안보와 인권이 만나고,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이 수렴하며, 평화적 방식에 의한 인권보호와 인권적 방식에 의한 평화보장이 교차한다.

평화권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면 인권을 실행한 결과로서 평화가 온다기보다, 개인과 집단이 평화를 목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적극적 평화론이 가능해진다. 인간 안보와 인권이 만나고,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이 수렴하며, 평화적 방식에 의한 인권보호와 인권적 방식에 의한 평화보장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인권침해의 구조적 원인으로 작동하는 갈등의 뿌리를 직시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평화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예상할 수 있듯이 논란과 찬반이 뜨겁다. 평화권을 하나의 독립적인 인권으로 인정하게 되면 인권의 이름으로 국가 체제를 직접 통제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국가가 내부적으로 폭력을 독점하고 외부적으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는 한 평화를 인권으로 요구하는 목소리는 국가주의의 칼날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 국가주의의 규정력이 지금까지 평화권을 정식 인권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왔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식있는 선각자들은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해 왔다. 반세기도 전인 1960년 대법원 판사였던 김홍섭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국가주의입니다. 인류보다 자기 주권을 더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모두가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는 고로 악입니다.” 깊이 음미할 만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이경주의 <평화권의 이해>가 최근에 나왔다. 일독을 권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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