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의 영웅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바위에 묶인 채 영원히 독수리에게 가슴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불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로부터 이탈시켜 신(神)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성물(聖物)이었기 때문이다. 불을 다룰 수 있게 된 덕분에, 인간은 비로소 문명을 주조(鑄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불을 ‘만드는’ 기술의 진보는 무척 더뎠다. 19세기 중엽까지도 불을 새로 지피는 것보다는 불씨를 지키는 쪽이 더 편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의 집에 불씨 얻으러 다니는 행위’는 게으른 주부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주부들로 하여금 ‘불씨 얻으러 다니는 창피’를 면하게 해 주고, 애연가들로 하여금 장죽을 물고 거리에 나설 수 있게 해준 것이 성냥이었다.
유럽에서 1830년대부터 상용화한 성냥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였다. 1876년 무위소(武衛所)에서 제조한 군기(軍器) 중에 자기황(自起磺)이 있었는데, 서양식 성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냥은 석류황(石硫黃)이 변한 말로 서양 부싯돌이라는 뜻의 양수화통(洋燧火筒), 스스로 불을 일으키는 유황이라는 뜻의 자기황(自起磺) 등으로 불렸고 일본 용어 인촌(燐寸)이나 중국 용어 화시(火柴)로도 표기되었다.
성냥은 개항장을 통해 본격 수입된 지 10년도 채 안 되어 한반도 전 가정의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1899년 4월, 서울 인사동에 고흥회사(杲興會社)라는 성냥 제조 회사가 설립되었다. 장정 30-40명, 어린이 50-60명을 고용한 대규모 회사였는데, 당시 인사동은 전국 최대의 가구 제조 단지였기 때문에 성냥 제조용 목재 부스러기를 구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성냥은 이후 100여 년 간, 불을 ‘만드는’ 도구로서뿐 아니라 어른들의 장난감으로, 이쑤시개 대용품으로, 초보적 계산기로 활용되면서 일상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 10-20년 사이에 인류는 불의 빛과 열을 나누어 쓸 정도로 기술을 발전시켰고, 더불어 성냥도 사실상 멸종 위기에 쳐했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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