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대안 없는 시절이다. 찍어만 주시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바꾸겠다던 정부 여당은 지방선거에서 간신히 살아나자마자 어김없이 원판불변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 못 미덥지만 한번 더 기회를 주었던 제1야당은 이제는 보궐선거 공천 파동의 뒤끝 속에서 지리멸렬 중이다. 그 많던 진보들은 저 많은 진보정당들로 갈팡질팡 흩어져 이제 누가 어느 당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 됐다. 원판불변, 지리멸렬, 갈팡질팡. 우리들 참 딱하다.
정치에 마음을 주었다가 무수히 상처받은 사람들이 더는 상처받기 싫어서 꺼내드는 처방전이 냉소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고, 정치가란 온갖 명분으로 치장해도 결국 자기 밥그릇이나 챙기는 인간들이라는 냉소를 준비해두어야만 이 비루한 현실을 견딜 수 있다. 게다가 이런저런 정치권 주변 인사들, 평론가들은 정치란 기껏해야 차악을 선택하는 행동이라며 공공연히 냉소주의를 설파한다. 공동체의 집합적 의지가 악에 가까운 쪽으로 결집되는 것이 그나마 나은 일이라니! 2014년의 대한민국, 아득하다.
이 딱하고 아득한 2014년 7월의 15일,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416개의 상자에 담긴 350만1266명의 서명이 국회에 전달되었다. 세월호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육필들이 거기 담겼다. 1000만명 목표분 중 1차분이다. 서명용지에는 아직 650만개의 빈칸이 남아 있다. 내가 한 서명은 수백만분의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 어떠리, 중요한 것은 내가 행동했다는 것, 그래야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다.
사흘 뒤 7월18일, 서울 종로의 수운회관에서는 300명의 시민들이 노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세월호 이후 ‘뭐라도 해야겠다’는 시민들이 한국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슈들을 진단하고, 새로운 가치를 상상하며, 요구와 다짐을 공유했다. 10대에서 80대까지 성별과 직업, 지역, 그 외 인간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온갖 범주들을 뛰어넘어 모인 이들이 4월16일을 잊지 않기 위해 필요한 행동 프로그램들을 스스로 고민하고 창안하고 다짐했다. “세월호 참사로 먼저 세상을 떠난 언니, 오빠들의 평생 친구, 후배로 남겠습니다”는 고등학생의 다짐부터, “과에서 학생회를 만들어 친구들과 작은 실천부터 하겠다”는 대학생까지 수백개의 다짐이 이어졌다. 이들은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자기 옆의 동료들과 함께 새로이 테이블을 만들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그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 이날 나도 작은 다짐 하나를 보탰다. “이웃들과 노란 테이블을 펼쳐보겠습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작은 힘을 보태겠습니다.”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가 자신의 역사적 생명을 다하고 소진되어가는 듯한 시절이다. 한때나마 정치는 사람들에게 나의 삶이, 이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이제는 정치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니, 말을 좀 고쳐야겠다. 그 ‘신화의 시대’를 돌이켜보니 정치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정치를 일으켜 세웠다.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주저앉지 않던 사람들이 말이다. 이제 정치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려는 이 찰나에 우리 스스로가 다시 정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 여기서, 뭐라도 하면 된다. 물론 그게 해결은 아닐 터, 그저 출발일 뿐. 하지만 출발하지 않은 채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출발을 위한 골든타임, 바로 지금이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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