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논설위원
얼마 전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에 재미난 기사가 실렸다. 베스트셀러를 산 독자들이 실제로 책을 몇 쪽이나 읽었는지 조사한 내용이다. 온라인서점인 아마존의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활용해 분석했다. 킨들은 모든 책을 대상으로 독자들이 밑줄을 많이 친 구절 5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구절들이 실린 쪽수의 평균값을 전체 쪽수로 나누는 방식을 취했다. 수치가 클수록 독자들이 책을 끝까지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 결과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이 9권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다.
피케티로서는 서운할 법하나 당연한 성적표 같다. 제인 오스틴과 오노레 드 발자크 소설을 인용하는 등 유인책을 쓰긴 했지만 한계생산성 이론이나 자본축적의 황금률 이론 따위로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부와 자본 개념을 혼용한 것 등도 약간 걸리적거린다. 나 또한 이런 난점에다 두터운 분량 탓에 중간에 포기할까 했다. 하지만 ‘나도 읽어봤다’는 과시욕이 발동해 완독하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진보·개혁 성향의 이름난 경제학자들이 찬사를 보내는지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21세기의 자본>은 무엇보다 분배 문제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 데 한몫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 같다. 대체로 19세기까지만 해도 분배는 경제학이 선호하는 주제였으나 그 뒤로 홀대를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인기있는 경제학원론 교과서 중에 분배이론을 별도 항목으로 다룬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책 쪽도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아왔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심해진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피케티 말대로, 경제성장 초기에는 불평등이 확대되다가 일정 단계가 지나면 축소된다는 쿠즈네츠 가설이 영향을 많이 준 것 같다. 불평등이나 분배를 들먹이면 좌파와 짝짓기하는 사회 분위기도 작용한 성싶다. 이런 상황에서 피케티 책의 출간은 논의의 장에 새 물꼬를 텄다.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 등으로 불거진 불평등 문제를 주요 의제가 되도록 이끈 것이다. 300년에 걸친 통계자료로 무장한 게 결정적 힘이 됐다. 유명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이 “피케티가 경제 담론을 바꿔놓았다;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방식대로 부와 불평등에 대해 (조심스레) 얘기하는 일이 더는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게 상황 변화를 일러준다.
또한 피케티가 자신의 분석을 토대로 피력한 불평등의 역사관이 공감을 자아낸다. 그는 경제·사회·정치 주체들의 역학관계뿐 아니라, 이들이 ‘무엇이 정의인가’를 인식하는 방식 등이 불평등의 행로를 좌우한다고 말한다. 관련 주체들의 구실이 중요하며, 한계생산 이론 같은 단순한 경제논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얘기다.
아울러 경제학자들이 현실과 유리된 상태에서 수학 및 순수이론 문제에 어린애처럼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한 대목 역시 인상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물론, 다른 사회과학자들과의 협업을 방기한 채 자신들만 관심을 갖는 사소한 문제에 몰두하는 양태를 겨눈 것이다. 사실 경제학 논문 가운데 수학 논문을 연상시키는 게 수두룩하지 않은가.
피케티는 우리나라에도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방법을 준용한 이런저런 불평등 연구가 진행중이고, 몇몇 학회가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튼실한 연구 없이는 논의가 겉돌 수밖에 없고,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오기 어렵기에 고무적이다. 일시적 유행에 그치지 않고, <21세기의 자본>에 버금가는 연구 성과가 나오면 좋겠다.
이경 논설위원 jae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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