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원장이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유병언(73·사망) 전 세모그룹 회장의 시신이 고도로 부패한 탓에 사망 원인을 판명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YTN 화면 캡쳐
[아침 햇발]
확실한 건 그가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죽음에 이른 과정은 장막에 싸여 있다. 자연사라면 원인이 뭔지, 자살이라면 왜 죽어야 했고, 타살이라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죽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가 왜 죽었는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다.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죽음 앞에 낭설이 분분하고 음모론이 창궐한다. 어떤 괴담과 유언비어가 나돌아도 정부는 할 말이 없게 됐다. 검찰이 경찰을 속이고 경찰이 검찰을 의심하는 판에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으라고?
어릴 적에 동네 사람들과 눈 쌓인 뒷산으로 토끼몰이를 나간 적이 있다. 개를 앞세운 채 몽둥이 하나씩 둘러메고 여기저기 흩어져 우우 고함을 지르며 산등성 아래쪽으로 토끼를 몰아간다. 다급해진 토끼는 포위망을 빠져나가려고 이리저리 헤매며 안간힘을 쓴다.
유병언은 영락없이 토끼몰이에 내몰린 산토끼 신세였다. 보수언론이 앞장섰다. 유병언을 잡으라고 연일 내질렀다. 대통령은 다그쳤다. 5차례나 공개적으로 검거를 채근했다. 김기춘 비서실장도 안달했다. “저희도 애가 탄다. 검찰, 경찰에 독려를 많이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검찰은 ‘올인’했다. “꼬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고 허풍까지 쳤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범인을 지목하는 게 손쉬운 법이다. 한 사람에게 몽땅 책임을 뒤집어씌우면 골머리 썩을 일도 없고 책임질 사람도 줄어든다. 그런데 원인을 탐색하지 않는 사회에선 같은 문제가 자꾸 되풀이된다. 구조적인 문제, 시스템의 오류는 고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병언 토끼몰이’는 그래서 후진적이다. 정부의 무능을 숨기고 책임을 덮기엔 더없이 좋은 가림막이었겠지만 말이다.
유병언이라도 붙잡았으면 또 모르겠다. 검찰과 경찰이 공조는 안 하고 공 다툼에 골몰했으니 놓치는 게 당연하다. 실패한 토끼몰이의 결말은 참으로 허무하다. 죽은 유병언에겐 ‘공소권 없음’ 처분이 내려질 것이다. 진상규명은 오리무중이고 책임자 처벌은 유야무야, 제도개선은 지지부진하다. 특별법은커녕 진상조사위 하나 제대로 못 꾸렸다. 세월호 이후 100일, 변한 건 무엇인가.
검찰은 뒤늦게 미주알고주알 ‘유병언 추적 분투기’를 써댄다. 코앞에서 놓친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엄청난 증거라도 찾은 양 돈가방까지 공개한다. 그러고 보니 검찰이 놓치지 않고 있다던 유병언의 꼬리는 경찰한테도 숨겨온 돈뭉치였던 거다. 문득 궁금해진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고 했는데 토끼 사냥에도 실패한 사냥개의 운명은 어찌되는 건가.
토끼몰이에 나섰던 이들은 뒤늦게 책임론에서 탈출하느라 바쁘다. 검거를 닦달하던 대통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김무성은 정부가 아니라 경찰 책임이라고 호도하고 주호영은 세월호 사건은 교통사고라고 망발을 한다. 검찰은 경찰을 탓하고 경찰은 검찰을 원망하는 가운데 검찰과 경찰, 법무부의 총수는 좌불안석일 것이다.
김기춘 실장은 경찰청장을 청와대로 불러 질책하더니 그 틈에 슬며시 친구를 주일대사로 내보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과 이들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다른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라인가.
사실 유병언의 죽음은 세월호 사건의 본질과 한참 떨어져 있다. 온 나라가 유병언 토끼몰이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모두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거다. 이제 그만 ‘유병언 미스터리’에서 눈길을 돌렸으면 한다. 그리고 제 발로 걸어나온 이들 외엔 아무도 구조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이며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찾아내는 데 관심을 쏟자. 유병언에게 쏟은 공력의 십분의 일이라도 말이다.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임석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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