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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판사 일색 대법원부터 바꿀 때다 / 여현호

등록 2014-08-14 18:42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나이 들어 보인다는 얘기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멀리서 혹은 사진으로 보는 김 대법관은 1~2년 사이에 나이를 많이 먹은 듯하다. 그새 시력도 많이 나빠졌다고 한다. 다 일이 많은 탓이다. 그 역시 다른 대법관들처럼 하루 종일 사건기록 속에 파묻혀 있다가 퇴근할 때도 기록 보따리를 싸들고 집으로 향한다. 그러고서도 김 대법관은 지난 일요일 오후 4시 다시 사무실로 나와 자정 가까이까지 기록을 들여다봐야 했다.

대법관들의 격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2년 한 대법관은 이를 “숨막힐 듯한 현상”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아무리 대법관이 오랜 법조경력으로 기록을 검토하고 판결을 쓰는 데 있어 남다른 능숙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분량”이라고 비명을 내지를 때의 대법원 사건 수는 1만여건이었다. 20여년이 지난 2013년의 상고사건 수는 3만6000여건으로, 대법관 한 사람당 매월 250건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고 봐야 한다.

대법관들의 희생으로 하급심의 오판이 시정되고 당사자의 정당한 권리가 구제된다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상고심에서 하급심 판결이 파기되는 비율은 지난 10년 동안 5%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94~95%는 그대로 기각되고, 그 가운데 70% 이상은 정식 심리도 없이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기각 처리된다. 대부분의 사건이 대충 또는 흘낏 스치듯 버려지는 꼴이다. 그렇다고 대법원이 ‘권리구제’ 기능 말고 우리 사회의 근본 가치를 제시하는 ‘정책법원’ 기능에 충실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 권위의 도구인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거친 사건은 지난해 22건에 불과했다. 대법원에선 전원합의체가 원칙이라고 법에 명시돼 있는데도 그랬다. 역시 사건이 많은 탓이다.

최근 대법원이 상고심 사건을 나눠 맡을 상고법원 설립을 적극 추진하고 나선 것은 이런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겠다. 올해 안에는 이를 확정할 방침이라고 한다. 대법원의 구상은, 권리구제가 중시되는 일반 사건의 상고심은 상고법원이 맡고 국민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중요 사건의 상고심은 대법원이 맡겠다는 것이다. 정책법원 기능과 권리구제 기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대법원이 정책법원 쪽을 선택하는 게 옳다. ‘재판다운 재판’이 보장된다면 굳이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최종법원을 맡지 않더라도 권리구제는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된다면 대법원도 지금의 모습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대법원이 정책법원으로서 중요 사건에 대해 ‘보편·타당한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근본 가치질서를 확인하고 제시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선, 대법원의 구성 역시 우리 사회의 보편타당한 가치질서를 반영해야 한다. 민주사회는 다원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다양한 가치관의 반영은 그 첫째 조건이다. 같은 배경, 비슷한 생각 일색인 대법원으로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이 반영되고 조화되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요컨대 교수나 순수 변호사 출신 하나 없이 전원 판사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해 판사 생활만 해온 50대 남성 고위법관’이 대부분인 지금의 대법원이 제대로 정책법원 구실을 하긴 어렵다는 얘기다. 더구나 상고법원이 일반 상고사건을 맡는다면, ‘산적한 재판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능력’이 있는 전문법관을 대법관으로 선호할 이유도 크게 줄어든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법관 출신이 전체 15명 가운데 6명에 불과하기도 하다. 상고법원 신설의 전제는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여야 한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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