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에 흰 천이 덮인 것처럼 보였다. 팔랑이는 미사포가 탐스러운 함박눈처럼 다가온 것이다. 산타의 빨간 옷이 화면에 선연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순교를 상징하는 붉은 제의가 언뜻 그렇게 보인 것이다. 시청 앞에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노란 불빛이 반짝이는 듯 흩날렸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리본의 나풀거림을 장식이 깜박이는 것처럼 본 것이다. 여름의 기세는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물러섰고 ‘비바 파파’의 함성과 우레 같은 박수, 기도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웠다. 광화문과 시청 먼발치에서 함께한 ‘시복식 현장’이 그랬다.
‘왠지 울컥’, ‘콧등 시큰’, ‘괜히 눈물’….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하는 누리꾼의 반응이다. 교황이 내민 손길에 세월호 유족이 친구(親口, 숭상하고 존경하는 대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입을 맞춤)하는 광경은 숱한 감동의 하나일 뿐이다. ‘유민 아빠’의 편지를 손수 주머니에 넣는 장면은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상대에 마음 못 여는 대화는 독백’이라 한 말씀은 잠언으로 남는다. 맞다. 대화는 ‘말하기’가 아닌 ‘듣는 것’으로 완성되고, 소통은 ‘전달’과 ‘수용’이 어우러지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시복 청원’을 받아들인 교황은 ‘가경자’(可敬者, 시복 후보에 대한 존칭)를 ‘복자’로 허락했다. 가톨릭의 ‘복자’, ‘성인’, ‘시복(식)’, ‘시성(식)’의 뜻은 여러 매체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수단’(목부터 발목까지 단추가 달려 있는 사제복), ‘장백의’(제의 아래 받쳐 입는 길고 흰 옷), ‘영대’(목에 걸어 가슴 앞으로 늘어뜨리는 띠) 같은 명칭은 낯설지 않은 표현이 되었다. ‘교황 성하’에서 ‘교종’으로, 다시 ‘낮은 자의 목자’로 다가선 교황 또한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머물렀던 닷새의 대한민국은 ‘8월의 크리스마스’로 기억되리라.
강재형 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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