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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국기

등록 2014-08-18 18:44

애국심, 애향심, 애사심 같은 말은 자주들 쓰지만, 애가심이라는 말은 없다. 가족은 사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다. 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지만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은 억지로 끌어내야 한다. 오히려 세상에서 제일 미운 인간을 하나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자기 나라, 자기 동네, 자기 회사 사람을 지목하게 마련이다. 소속감을 느끼는 것과 그 집단 또는 집단의 구성원들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런데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집단에 대한 사랑을 이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를 볼 수 있는 그림, 만질 수 있는 사물로 전환시킨 것이 국기다. 국기는 국가에 대한 모호한 관념을 구체적 행위로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1883년 1월 조선의 국기로 공포된 태극기는 이후 10여년간 주로 선박의 국적을 표시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태극기가 백성의 충군애국하는 마음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였다. 이 무렵부터 황제의 생일이나 국경일에 태극기를 내거는 것은 신민의 의무가 됐다. 더불어 ‘국기는 임금과 인민을 몸 받은 것이니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계몽도 확산되었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배례, 찬송, 기도로 구성된 기독교 예배 의식을 변형시킨 미국식 ‘배기창가례’를 소개했고, 몇몇 신식 학교가 이를 채택했다. 이는 이윽고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으로 이어지는 현대 국민의례로 발전했다.

배기창가례가 도입되기 전에는 집회 해산 시에 “황상 폐하를 위해 만세를 부르고, 황태자 전하와 이천만 동포 형제와 국기를 위해 천세를 부르는” 것이 국기에 대한 의례였다. 전제군주제하에서 주권자인 황제의 지위는 국기보다 열곱절 높았다.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국가에서는 국기보다 국민이 훨씬 더 존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국기를 대하는 태도에 관해서는, 한국인들은 주권자라기보다는 신민에 가깝다. 한국은 왕조시대에 제정된 국기를 공화국이 된 뒤에도 그대로 쓰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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