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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8월의 크리스마스, 그 뒤 / 이유주현

등록 2014-08-31 18:35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모든 한국인들이 슬픔 속에 하나가 됐다”고 말한 게 보름 전쯤이다. 그는 8월15일 삼종기도에서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한국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손을 모았다. 교황의 방한은 세월호 참사 이후 슬픔과 억울함으로 심신의 에너지가 방전돼버린 유족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다. 속절없는 기다림으로 팽목항에 남은 실종자 가족들은 교황이 보낸 편지와 묵주를 받으며 펑펑 울었다.

그러나 교황이 떠나자마자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여름에 내린 눈처럼 거짓말같이 녹아버렸다. 교황이 떠난 이튿날, 여야는 세월호 특별법을 합의했다가 유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그 뒤 교황과 이름이 같은 13세기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와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사랑과 용서, 일치 대신 미움과 다툼과 분열이 일었다.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0일 넘게 곡기를 끊었던 ‘유민 아빠’ 김영오씨에 대한 갖가지 마타도어(흑색선전·중상모략)가 떠돌기 시작했다. 김씨의 페이스북엔 단식을 비아냥대는 음식 사진이 올라왔고, ‘우파’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한 단체는 ‘폭식투쟁’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우리나라는 내 새끼만 안 죽으면 되는 나라냐”며 울먹였다. 또 다른 친구는, 지인들 사이에 떠도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고 ‘이혼남 김씨’를 비난하는 엄마와 고성을 주고받았다. 각종 여론조사는 세월호 특별법으로 한국 사회가 딱 두 조각 났음을 보여줬다. 세월호 협상을 다시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2년 전 대선 때 연령, 정치성향에 따라 지지하는 후보가 갈렸던 것과 흡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중앙일보> 조사에선 ‘대통령이 유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의견과 ‘대통령이 나설 필요 없다’는 쪽이 똑같이 49.5%였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을 통과하며 애도는 정쟁으로 변했고, 여야 협상을 거치며 편이 갈렸다. ‘세월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는 사회적 화두는 진영논리로 대체됐다. 한마디로 ‘세월호 국회’는 망했다.

정부책임론으로 주눅들었던 새누리당은 다시 어깨에 힘을 주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가까운 한 야당 인사에게 “새누리당 지지층 대부분이 여야 협상안을 지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고, 염수정 추기경도 유족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느냐”며 자신감을 보였다고 한다. 유족들과의 특별법 협상 전날인 31일에도 새누리당은 “유가족이 전향적으로 생각해서 헌정질서와 법체계에 근접한 제안을 해주길 바란다”며 압박했다. 반면 세월호 참사 100일을 앞두고 온종일 빗속에서 유족들과 걸었던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온갖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새정치연합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안갯속이다. 야당의 한 의원은 “손은 이미 콩밭에 들어갔는데, 비는 오고, 똥은 마려운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한달 전쯤 찾아갔던 팽목항이 떠오른다. 100일 넘게 계속된 사람들의 눈물로 염도마저 변했을까 싶었던 바다는 아무 일 없었던 듯 평화로운 모습으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러나 고장난 정치는, 모든 것을 잊은 듯한 팽목항 앞바다와 같을 리 없다. 오만과 무능이 빚어낸 블랙코미디는 앞으로도 반복·변주될 테니. 실패가 거듭되기 때문에 잊기도 힘들다는 절망감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동의어가 돼버렸다.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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