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동생과 누이 가족들을 배웅한 뒤 저녁 산책길에 올려다본 한가위 보름달이 참 밝다. 달무리도 없이 말끔하게 잘빠진 달을 보며 식구의 무사 무탈과 소원성취를 떠올리다 문득 죄스러워졌다. 추석 차례상 대신 열일곱살 자식의 영정 앞에 과자와 음료수를 놓고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사람들이 있다. 저 달을 보면서도 눈물지을 것이다. 그래서, 고쳐 빌게 된다. 대통령도 저 달을 보기를, 청와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 위에서 달을 보며 우는 유족들의 마음도 함께 볼 수 있기를.
정작 박근혜 대통령의 추석 덕담엔 세월호가 없다. 그도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셨는지요?”라고 물었지만, 그가 말한 소원은 “나라 경제와 국민 여러분의 행복”이라는, 많이 듣던 문구뿐이다. 그늘진 이들의 눈물과 한숨에 대한 공감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함께 소원을 빌어 그 꿈이 이뤄졌으면 합니다”라는 말에서 ‘총화’나 ‘총력’ 외의 다른 목소리는 꺼리는 알레르기까지 보았다면 지나친 것일까.
애초 그에게서 원융(圓融), 혹은 세상을 두루 밝히는 달과 같은 구실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수사는 군주제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일그러지고 뒤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5년 임기의 3분의 1을 앞둔 지금, 박근혜 정부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변국들의 움직임이 분주하고 변화의 흐름이 빨라지는데도 박근혜 정부는 동북아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영향을 미칠 만한 어떠한 움직임이나 정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북 정책에도 현상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조처는 없다. 보기엔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내정은 더하다. 인사 참사가 거듭되면서 국정의 각 부분은 도돌이표처럼 출발점만 맴돈 채 이쪽이든 저쪽이든 도무지 진척이 없다. 정책이건 인사건 어떤 구조에서 누가 결정을 하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웬만한 장관이나 수석은 결정권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 비정상이 계속되다 보니 1년6개월 동안 이 정부가 무엇을 했는지 ‘대표 상품’이 떠오르지 않는다. 임기의 3분의 1이라면 큰 가닥을 굳히고 실행에 박차를 가할 때인데 앞으로 무엇을 할지도 분명치 않다. 경제를 살리겠다면서 들고 나선 수단은 수십년 묵은데다 위험하기까지 한 부동산 부양책이 고작이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때도 그랬지만, 지금의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파행에서도 대통령은 정국을 수습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되레 고집으로 정국 경색만 부추긴다. 그러고선 야당 쪽만 손가락질한다. 일이 안 되도록 상황을 꼬이게 한 것이 그 자신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일머리’가 없다는 것은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는 70년대 후반 퍼스트레이디의 대역을 했다. 지금도 대통령의 대역을 하고 있는 것일까. 추석을 맞아 으레 하던 대로 전통시장을 찾지만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웃는 일 말고 쇠락해가는 재래시장을 살릴 실질적 대책은 손에 없다. 선거 때 ‘준비된 대통령’을 표방했지만 준비한 게 무엇인지는 여태 보이지 않는다. 선거 구호 가운데는 자신에게 덜 우호적인 세대·지역·이념까지 아우르겠다는 ‘100% 대한민국’도 있었다. 현실은 정반대다. 당연히 진상이 규명되어야 할 세월호 참사를 일부러 진영 싸움으로 몰고 가는 바람에 폭식투쟁 따위 비인간의 야만을 불러오고, 국민을 이전보다 더 분열시켰다.
늦더위에 추석 음식 상하듯, 성취와 성과는 보이지 않고 곳곳에 실패의 냄새만 그득하다. 실패한 대통령에서 대통령제의 실패를 보는 사람도 있겠다. 뭔가 다른 대책, ‘플랜 비’를 생각할 때인 듯하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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