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용서라는 고통>, 스티븐 체리 지음, 송연수 옮김
황소자리, 2013
<용서라는 고통>, 스티븐 체리 지음, 송연수 옮김
황소자리, 2013
연휴에 본 영화의 한 장면. 어떤 남자가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정당한 복수’를 미루자 그의 멘토가 “복수가 끝나면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을까봐?”라고 공감해준다. 주인공도 나도 끄덕였다. “다 지나간 일, 잊고 새 삶을…” 운운은 진부함 이전에 불가능하다. 어떤 이에겐 복수, 죽음, 삶의 차이가 없다. “그때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내 사전에는 ‘용서’가 없다. 용서를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개념 목록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무엇이 용서인지, 그것이 어떤 행위인지, 어떤 행위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유난히 화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용서받아야 할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짐작한다. 용서의 어려움을 안다면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용서’가 자주 출몰하는 사회는 부정의한 사회다.
용서가 아닌 보복,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상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 전제가 없다. 이 말의 전제는 권력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만 해당한다. 상처와 피해는 현격한 권력관계의 차이로 발생하는 문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눈과 이를 해치려고 해도, 보디가드 많아서 혹은 가해자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현실 때문에 가해자의 얼굴에 접근이 어렵다.
<용서라는 고통>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말라는 요지의 정의로운 책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정서에는 부담이 되었는지 “상처의 황무지에서 싹틔우는 한 줄기 희망”이라는 별로 희망적이지 않은 부제를 달았다. 원제(Healing Agony)에는 부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말 제목 <용서라는 고통>은 책 내용을 잘 요약한다. 나의 독후감은 좀 다른데 이 책은 용서의 고통보다 어려움, 불가능성에 대한 고찰이다.
저자가 인용한 극작가 피터 섀퍼의 <고곤의 선물> 중 극중 대사가 용서의 어려움을 정면으로 대변한다. “우리 안의 삐뚤어진 열정을 죽이는 것도 열정이에요. 가장 진실하고 용감하고 성숙한 열정은 발을 구르며 자신을 몰아가지 않아요. 분노에 휩싸여도 그 분노에 휩쓸리길 거부하는 게 열정이에요…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우리 옆구리를 파고드는 이 뾰족한 창을 우리 스스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빼내야 하죠. 그 속의 창자까지 같이 딸려 나오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22쪽)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런 말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위로가 될까. 그들이(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의다. 상대편이 처벌받고 나와 똑같은 경험을 통해 깨닫는 것. 이것은 보복이 아니다. 최고의 위로다.
용서를 하든 복수를 하든 진짜 피해는, 피해자가 가해자 및 그 사건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남은 인생을 가해자와 함께하는 지옥. 피해자가 가해자와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무림의 고수도 몸 안에 들어온 뾰족한 창을 스스로 뽑기도 어렵거니와 창자가 딸려 나오지 않게 뽑았다 해도 살점은 남아 있다.
저자는 저명한 신학자지만 책에 특정한 종교색은 없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모욕과 억압을 당하는 민초들에게 그리고 신을 빙자해 용서가 높은 경지의 인격인 양 떠드는 사람들에게 저자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분노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분노의 지속이나 악화에 대해서는 경고하지만 분노를 엄연한 삶의 한 단면으로 인정한다… 한번은 성경공부 모임에 랍비 한 분을 초대해 예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는 예수를 이렇게 평했다. ‘그분도 성미가 대단하셨지요’… 분노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구하는 마음속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116쪽)
끝으로, 가해자를 떠나보내는 나의 복수 ‘비법’을 소개한다. 상대를 ‘없애는’ 것이다. 관련한 모든 데이터를 삭제하고 전원을 꺼버린다. 무관심의 힘으로 그들을 비인간화시킨다.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물화(物化)시키는 것이다. 가해자를 대상화하면 나는 그/녀와 분리된다. 그 다음, 피해 상황을 텍스트로 만든다. 예술이 생존에 필수적인 이유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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