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억지와 극단의 주장이 판치는 거대언론들을 보고 어떻게 말할까. 난데없이 야권의 연합공천을 큰 잘못인 것처럼 공격하고, 더구나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있는데도 ‘종북’ 운운의 비난이 명예훼손이 안 된다고 강변하는 매카시즘적 행태에 대해서는….
해방 후 교육을 받은 첫 세대 언론인 가운데 뚜렷한 인물로 천관우, 송건호, 박권상씨가 떠오른다. 그 가운데 박씨는 미국과 영국에 오래 있었기에 대단히 국제화된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1주기 추모문집을 준비하는 가운데, 이제까지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던 ‘여야 정치인 상설 간담회’가 떠올라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박권상씨가 주재했던 간담회에는 그 말고는 모두가 현역 국회의원인 다음과 같은 인사가 참여하였다. 김원기(나중에 국회의장), 김용환(전 재무부 장관), 남재희(나중에 노동부 장관), 박관용(나중에 국회의장), 이종찬(민정당 원내총무를 오래 했고 나중에 국정원장), 조세형(김대중 당의 당수권한대행을 했고 나중에 주일대사), 조순승(미주리대학 교수 출신), 황병태(나중에 주중대사), 아홉명의 고정 멤버에 김광일(나중에 청와대 비서실장), 김근태(나중에 보사부 장관) 의원과 원외인 진보정객 장기표씨가 몇 번 초청되어 참석하였다.
멤버는 박권상씨가 짠 것으로 정당별로는 남재희, 이종찬이 여당, 김원기, 박관용, 조세형, 조순승, 황병태가 야당, 김용환이 제이피(JP)의 제3당인데 3당 합당으로 박관용, 황병태, 김용환이 여당에 합류한다.
지역 안배도 고려했던 것 같다. 서울(이종찬), 충북(남재희), 충남(김용환), 경북(황병태), 부산(박관용), 전북(김원기, 박권상, 조세형), 전남(조순승)이다.
박권상씨는 권력에 핍박당해 해직기자로 오랫동안 유랑을 하며 고생을 하다가 1989년 동아그룹의 차남 최원영씨와 손을 잡고 <시사저널>을 창간하게 된다. 그런데 최씨가 의욕적으로 재정지원을 하여 빌리 브란트, 자크 시라크, 스티븐 호킹 박사 등 국제적 명사들도 초청하고, 정치인들 모임도 뒷받침한 것이다.
처음 몇년은 매달 고급호텔에서 모임을 가졌다. 최씨가 직접 참석하기도 하였다. 3, 4년쯤 후 최씨의 지원이 끊긴 다음은 멤버들 가운데 스폰서가 생겨 약간 비용절감을 하여 모였다. 속초와 광양 등 지방에 가서 숙박을 하며 세미나도 하였다. 모임은 김대중 정권 초기까지 7년쯤 계속된 것 같다. 국정원장이던 이종찬씨가 스폰서하기도 하였으며 국회의장이 된 김원기씨가 의장 공관에서 열기도 하였다.
여야 정치인들의 모임이니 현안의 모든 문제가 자유로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정국에 난제가 있을 때에도 그 모임에서는 신통하게도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모두 수준이 있고 온건한 인물들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모임에서의 대체적인 의견 일치가 현실정치에 그대로 옮겨져 이행된 것은 아니다. 그런 구속력 있는 기구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아무 거리낌이 없이 담소하는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가 알아서 각각의 정당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짐작한다.
약간 유별났던 것은 박권상씨가 내각책임제를 선호하여 모임에서 자주 내각책임제를 설득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광양 모임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절차까지도 이야기했다. 광양모임에는 박태준씨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었는데 그때 이미 대권 생각을 굳혔던 모양이다. 의원들은 내각책임제에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대통령제파도 있었겠지만 그런 사람도 모임의 분위기를 생각하여 굳이 강한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당시 박권상씨는 다른 정치 모임에서 내각책임제를 주제로 발표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제는 미국의 국경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이식될 때 ‘죽음의 키스’(kiss of death)를 만난다는 구절을 자주 되풀이하였다.
그러면 그 간담회가 어떻게 성립되었고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박권상, 조세형, 남재희의 셋은 모두 언론인들 친목·연구 단체인 관훈클럽의 총무를 지냈고, 또한 모두 하버드대의 니먼 언론 연구원 프로그램으로 한 학년씩 다녀왔다. 그런 인연으로 셋은 밀접할 수밖에 없다.
그다음, 한때 전주나 전북은 언론인 명산지였다. 훌륭한 언론인들이 그 지역에서 특히 많이 나왔었다. 그래서 전언회(全言會)라는 것이 유명하다. 박권상, 조세형씨는 김원기씨와 거기서 연결된다.
세번째로, 박권상씨는 특파원으로 또는 대학 연수로 영국에 아주 오래 체류했었다. 거기서 중앙정보부의 간부로 그곳에 파견된 이종찬씨와 친해진 것이다. 독립운동의 명문가 출신 이종찬씨는 이 영국의 경험으로 정치적 식견이나 행태가 수준 있게 된 것 같다. 그러면 모두 다섯명이다. 아마 이 다섯명을 바탕으로 하여 9명의 간담회로 확대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박권상씨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주간을 지낸 동아일보맨이다. <중앙일보>와 나중에 <한겨레>가 새로 생기고, <조선일보>가 커지기 전까지는 동아가 우뚝하게 대단한 위력을 가졌었다. 특히 티브이가 언론의 전면에 나서기까지는 그랬다. 따라서 그 동아일보의 박권상씨 영향력도 대단했다.
본인의 역량도 있고 그런 배경도 있기에 현역 중진 국회의원 다수가 참여하는 상설 간담회 운영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간담회는 틀림없이 우리의 현실정치에 알게 모르게 좋은 기여를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도 그런 모임이 있을 것이다. 내놓고 선전하지 않아서 그렇지 서로가 알음알음 모일 것으로 본다. 그런 여야 간의 비공식 모임이 많았으면 싶다. 그런 것들이 여야관계를 원만하게 성숙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우리 정치의 격을 높이는 데도 보탬이 될 줄 안다.
이번에 박권상씨의 글들을 새삼 살펴보면서 그는 그동안의 ‘미국 편향’과 보수 성향 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자주성을 강조하고 개혁적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언론계의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여길 글들이 많다.
우선 앞에 말한 정치간담회에 관련된 내각책임제 문제를 보면, 그는 전반기에는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중심제에 관해 선택적, 애매한 태도를 보였었다.
다만 대통령제일 경우라도 프랑스처럼 결선투표제를 채택함으로써 지역 간 또는 정치세력 간의 연합을 촉진하여 과반수 국민이 지지하는 대통령을 뽑을 것을 주장했으며,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서는 명부식 비례대표와 특히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주장하였다. 국회의원의 어느 정도의 수를 그리하느냐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대단한 미국통이어서 주변에서는 ‘친미파’로 무조건 치부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특히 그의 미국에 관한 견해를 인용해 보겠다.
“결국 우리는 싫든 좋든 숙명적으로 동반관계는 유지될 것이 분명한데, 그럴수록 불평등·예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좀 자주적인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는데, 40년간 몸에 밴 신판 사대주의 성향을 탈피하는 자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결말이 자칫 급진적으로 치닫기 쉬운 젊은 세대에 바른 정신문화를 넘겨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김대중 정권 시절 <한국방송>(KBS) 사장을 지내는 것으로 언론생활을 마감하였다. 그 기간이 무난했던 것으로 보아 언론인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둔 것 같다.
그의 언론관을 보면…
“… 어느 개인, 어느 집단, 어느 세력에도,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경우에조차, 거기에 스스로를 100퍼센트 ‘코미트’(몰입)해서는 안 된다는 언론의 원칙이 있다.”
“재벌이 직접 소유하는 신문이거나 재벌이 주는 광고수입에 의존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언론이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 볼 때 위험천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억지와 극단의 주장이 판치는 거대언론들을 보고 어떻게 말할까. 난데없이 야권의 연합공천을 큰 잘못인 것처럼 공격하고, 더구나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있는데도 ‘종북’ 운운의 비난이 명예훼손이 안 된다고 강변하는 매카시즘적 행태에 대해서는….
남재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