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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화장품

등록 2014-10-13 18:47


임금이 늘 종친과 재상들에게 기생을 멀리하라고 경계하며 말하기를, “이 무리는 사람의 부류가 아니다”라 하고 잔치할 때면 반드시 기생들로 하여금 얼굴에 분(粉)을 두껍게 바르도록 하니, 그 모양이 마치 가면을 쓴 것과 같았다.(세조실록 권 31. 9년 윤7월4일)

화장품의 기원은 태고(太古)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에도 원시적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냥 나갈 때나 축제 무렵이면 얼굴과 몸에 각종 색료를 칠한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특별한 사람들만 상용(常用)했고, 보통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나 사용했다. 일상의 노동이 피부에 점착된 이물질을 쉬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장품은 대체로 ‘땀 흘리지 않는 여성’의 표지였다. 우리나라에서 화장품이 대중화한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 허용된 뒤의 일이다. 이 욕망은 ‘얼굴에 매일 분칠하는 것은 기생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평민 세계의 관념을 어렵지 않게 분쇄했다.

신문에 외국산 화장품 광고가 처음 실린 것은 1901년이었고, 1907년 경성박람회 때에는 화장품이 당당하게 전시장 한구석을 차지했다. 1908년 한국 최초의 ‘백화점’을 표방하고 개점한 한양상회는 판매 품목을 소개하면서 화장품을 두번째 자리에 놓았다. 1914년 남대문 옆에 웅자(雄姿)를 드러낸 백화점 아오키도(靑木堂)는 프랑스 에그레스사 화장품을 직수입 판매했고, 이듬해에는 박가분이 첫선을 보였다. 중일전쟁 후 유럽과 미국산 화장품 수입이 중단되자 한국에 있던 프랑스인 프레상은 ‘세봉’이라는 상표를 붙인 화장품을 만들어 프랑스제라고 속여 팔다 적발되기도 했다.

화장품 시장의 확장 속도가 빠르기는 했으나, ‘외출하는 여성은 화장하는 게 예의’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이 끝나고도 꽤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그 후 다시 10여년 뒤에는 남성들의 피부에도 화장품이 묻기 시작했다. 이제 화장품은 늘 엷은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필수품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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