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지난 2000년 민주당에서 ‘정동영발 정풍운동’이 불었을 때 정치부에서 일했던 한 선배 얘기다. 당시 ‘개혁의 대상’이었던 권노갑 최고위원을 취재하기 전엔 심호흡부터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문성민 비서는 전화를 받으면 “<한겨레>가 언제 우리 얘기를 옳게 써준 적 있느냐”며 화부터 먼저 냈다는 거다. <한겨레>는 정풍운동에 우호적인 논조였다.
현재 박근혜 정부의 ‘문고리 권력’ 논란은 발뒤꿈치에도 못 미칠 정도로, 김대중 정부 시절 구악의 ‘아이콘’으로 비난받던 권노갑. 요즘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선 12년 전 정치 일선을 떠난 84살 고령인 ‘권노갑’이 자주 오르내린다. 제 식구들끼리 아웅다웅하는 새정치연합의 딱한 사정 탓이다. 택시기사 눈에도 “뭔가를 자신의 뒤에 감추고, 음흉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사람”(권노갑 자서전 <순명>)으로 비쳤던 그가 이젠 분열된 당을 도닥이는 ‘화합의 어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박영선 당시 원내대표가 탈당 뜻을 밝히며 칩거하던 때, 권노갑 상임고문은 본인과 직접 연락이 닿지 않자 남편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탈당을 말렸다. ‘박영선 사태’가 정리되자 이번엔 비대위원장 선출이 문제였다. 권 고문은 본래 동교동 출신이자 김한길 전 대표 쪽 ‘비주류’가 지원하는 이석현 부의장을 비대위원장으로 밀었다. 그러나 그는 당의 어른들이 모인 ‘비대위원장 추천단’에서조차 계파갈등을 정리 못 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비대위원장 후보 본인들을 빼면 추천단 중 10명은 이석현, 13명은 문희상, 3명은 박병석을 밀었다. 이처럼 팽팽한 상황에서 투표로 결정하면 진짜 당이 망가진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이 부의장에게 비대위원장 출마를 접는 게 좋겠다는 뜻을 전했고, 이 부의장은 ‘깔끔하게’ 물러섰다. “이석현을 지지해달라”며 전화를 돌렸던 비주류 쪽 주승용 의원은 “투표하면 이겼을 텐데 왜 물러나냐”며 아쉬워했다는 말이 들린다. 권 고문은 이후에도 문희상 비대위원장에게 “어차피 비대위에 계파 수장들이 다 들어가 있으니, ‘반노’인 정동영, 김한길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했고, 김한길 전 대표에게도 비대위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새정치연합은 권 고문이 호소하는 ‘화합’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9일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 때 당 일각에선 ‘비대위가 너무 주류 중심이기 때문에 당연직 비대위원인 원내대표는 비주류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당과 협상을 잘하고 소통이 원만한 사람을 뽑자는 게 아니라 당내 세력 균형을 맞출 사람을 뽑자는 논리였다. 그러잖아도 소통·협상이 잘 안돼 전임자가 물러난 마당에 이런 계파 논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비노·중도 성향의 전·현직 의원 20여명이 결성한 ‘구당구국’ 좌장이자 5선을 지낸 정대철 고문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중도 성향을 강화한 신당 창당에 나설 수 있다”고 말하며 분란을 부추겼다. 권력을 놓고 주류-비주류가 나뉘고, 계파가 갈리는 것, 자연스럽다. 권 고문 역시 비주류 쪽이고 2012년 총선 공천 때 독식 논란을 자초한 친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러나 여의도 밖 민심이 야당을 떠나는데, 자리를 맡고 떠나고 당을 짓고 부수고 해봐야 무슨 소용 있을까. 최근 새정치연합 서울시당의 여론조사에서 비새누리당 성향의 서울시민들 84.5%가 “새정치연합은 야당으로서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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