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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삐라

등록 2014-10-20 18:50

해하에서 유방의 군대에 포위된 초나라 병사들의 귀에 고향 노래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불현듯 향수에 젖어 눈물을 흘리며 전의를 상실했다. 기원전 202년의 이 심리전은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사자성어를 낳았다.

상대의 마음을 교란하고 공격하는 심리전은 인류가 전투 행위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 불가결한 구성 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노래 부르거나 소리 지르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적진에 접근하지 않고도 적군 개개인을 타격할 수 있는 심리전 무기를 개발하는 데에는 인쇄술의 발달, 값싼 종이의 보급, 무엇보다도 문맹 퇴치가 필요했다.

우리나라에서 ‘삐라’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였다. 청구서나 계산서를 뜻하는 영어 빌(bill)의 일본어 발음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총독 정치를 비난하는 소형 비밀 출판물, 상품 선전을 위한 소형 광고지, 전시에 살포하는 소형 인쇄물의 의미로 두루 쓰였다. 하지만 이 시절에 삐라를 직접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전쟁 중 한반도의 지표면에 탄피 다음으로 많이 떨어진 것이 삐라였다. 미군이 살포한 삐라만 25억장, 한반도 전역을 스무겹으로 덮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미군은 심리학, 사회학, 언론학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상황별, 대상별로 어떤 내용과 형식의 삐라가 효과적인지 연구하고 실행했다. 북한과 중국군도 삐라를 뿌렸으나 제공권이 없었기에 그 수량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그런데 삐라의 홍수는 당연한 반작용으로 그에 대한 저항력도 키워줬다. 남에서든 북에서든, 사람들은 ‘적의 선전에 동요하는 불순분자’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삐라에 반응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오늘날 퇴근하고 귀가한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맞아 주는 건, 십중팔구 현관문에 붙은 상업 전단지들이다. 이들은 일상이 전투인 고강도 경쟁사회를 뒤덮은 심리전 삐라로서, 빨리 투항하라고, 쿠폰을 오려 오면 우대한다고 속삭이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이를 묵살한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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