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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우의 빨강] 멧비둘기를 읽다

등록 2014-10-21 18:37

김선우 시인·소설가
김선우 시인·소설가
오래전 잠깐 제주에 산 적이 있다. 일몰 무렵 협재 바닷가 근처를 걷다가 무조건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가방을 풀었다. 심장이 쿵쾅거려 아득해질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일몰과 일출을 누리면서 걷고 글 쓰고 여섯 달을 사는 동안 마침 낡은 집의 베란다에 멧비둘기 한 쌍이 동거했다. 어느 날 문득 그들이 알을 낳았다. 하루에 한 알, 다음날 또 한 알. 알을 낳을 때 어미는 너무 고요해서 몸 푸는 줄도 몰랐다. 새의 알을 코앞에서 보게 된 나는 그 알들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어미의 몸과 분리된 생명탄생의 장소인 알은 낯설고 신비로웠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난생을 부러워했다. 저렇게 알로 나를 낳아주고 세상 밖으로 나갈지 말지를 내 판단에 맡겨주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자기선택을 거친다는 측면에서 난생신화의 영웅들은 본질적인 낙천성을 지녔다. 멧비둘기 부부는 매일 정성스레 알을 품을 뿐 자신이 낳은 알에게 뭐라 강요하는 법이 없다. 그렇게 열이레가 되었을 때 알 하나가 깨지며 고물고물한 아기가 껍질을 밀고 나왔다. 그런데 다른 알 하나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미동 없는 알을 사흘간 더 품고 있던 멧비둘기 부부가 알껍질에 가만히 부리를 대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햇살이 꽃씨처럼 반짝거리는 오후였다. 생명 앞에 치러진 성결한 의식 같은 고요한 접촉이었다. 근래, 참사라고 해야 할 안전사고가 너무 잦아 안타깝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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